대구의 진취적 기상
달구족의 진취적 기상과 실천유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2만년 대구 역사상 대구의 아이덴티티가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사건이 바로
국채보상운동과 2.28학생운동이라 할 것입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빌려준 국채 1,300만 원을
2,000만 국민이 석 달만 담배를 끊어 갚자고 하며 벌인 운동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입니다.
바로 이 곳 대구에서 서상돈‧김광제 두 선생에 의해 제창된 이 운동은
전 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고종황제까지도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경제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평동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만들고,
‘달구벌대종’을 만들어 걸어서
자손만대에 대구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 남일동의 진(긴)골목을 중심으로 활동에 나선 7부인의 모임인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가 여성국채보상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대구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를 세우고,
'경고, 아! 부인동포라.'라는 당시의 격문을 새겨 넣고
장한 대구 여성들의 정성을 기리고 있습니다.
1907년 1월 29일 김광제‧서상돈 선생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인쇄‧출판사였던 광문사에서
서상돈선생이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습니다.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은
정부의 1년 예산(1907년 세출예산 1,395만원)과 맞먹는 거액이었습니다(2006년 정부세출예산은 144조 8천억원).
광문사의 옛터인 서성로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어 안타깝습니다.
뿐만 아니라 계산동에 있었던 서상돈선생의 고택도
하필이면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되는 때의 직전에 아파트 공사 때문에 헐려 나갔다가,
복원해 놓았다고는 하나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07년 2월 21일에는 현재 대구시민회관 자리에 있었던
당시의 북후정 앞에서 대대적인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북후정이 있던 자리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세우고, 2월 21일을 국채보상기념일로 하였습니다.
1960년 2월 28일,
우리 헌정사상 가장 부끄러운 3.15부정선거가 자행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일요일이었던 이날, 수성천변에서 야당 대통령후보인 장면박사의 연설회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집권여당이었던 자유당정부는 대구시내 공립고등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령을 내렸습니다.
독재정부의 간계에 분노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만행을 규탄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으며,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습니다.
학생이 주동이 된 민주화운동으로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4.19학생운동의 기폭제가
바로 이 대구의 2.28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두류공원 내에 2.28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또 공평동의 2.28기념 중앙공원에는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대구의 기상처럼
분수대가 하늘높이 물을 뿜어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