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고장

햇미나리와 조길방가옥

깊은 강 흐르듯이 2019. 2. 19. 15:45

기해년의 우수를 하루 앞둔 날 햇미나리를 먹으러 집을 나섰습니다.

귀로에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달성조길방가옥'을 들러봅니다.

해발 450m의 급경사길을 올라서 보니 늙은 자동차가 허연 숨을 내쉬며 땀방울도 뚝뚝 떨어집니다.

진찰을 받아야 될까 봅니다.

차주인도 나이들기는 매한가지여서 덩달아 숨이 가쁩니다.


안채는 1784년에 현 소유자의 10대조께서 가화(家禍)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급경사지에 터를 잡고 막돌허튼층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의 목조(木造)모즙(茅葺:띠지붕,초가지붕)의 3량가(梁家)입니다.

이 집은 '싸리기둥에 칠기봇장'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는데요..


대청 중앙의 두리기둥을 싸리기둥이라 하고, 그 위에 앞뒤로 걸쳐진 홍예보를 칠기봇장이라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고건축물에서 싸리기둥이라고 하는 곳은 이 집 말고도 여러 곳(특히 사찰)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학술적으로 보면 싸리나무는 직경 3-4cm 이상 자랄 수 없는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싸리나무라고 하는 고재의 조직검사를 해 보면 대체로 느티나무라고 합니다.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둔갑하게 된 것은,

사찰에서 사리(舍利)함을 만들 때 목질이 단단한 느티나무를 많이 쓴 데서 유래하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칠기봇장이라는 말은 이 집 말고는 알려진 곳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칠기'라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경상도 방언으로 '칡'을 '칠기'라고 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른 말로 칠기는 '옻칠을 한 목기'를 의미하는데, 들보에까지 옻칠을 했을 리는 만무하고요,

그렇다면 '칠기봇장'은 '칡넝쿨 또는 칡뿌리로 만들어진 들보'라는 얘기가 됩니다만,

이 집 들보의 어디를 봐도 나이테가 분명한 '나무'입니다.

칡은 줄기나 뿌리를 잘라도 보고 캐 보기도 했지만 나무와 같은 나이테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칠기봇장이란 아마도 '칡넝쿨처럼 구불구불 휘어진 들보'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관련분야의 학자나 전문가의 연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청마루엔 이 집의 자랑거리가 많이 붙어 있습니다.

'백세청풍'이라는 가훈 족자가 걸려 있고요,


이 가훈의 내력을 증명하는 선조들의 교지들이 여럿 걸려있습니다.


이 가옥의 문화재지정서도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습니다.

'제200호 중요민속문화재'입니다.


안채에서 봐서 좌측 아랫쪽의 정면3칸 측면1칸의 사랑채 역시 초가입니다.

이 사랑채를 비롯하여 다른 건물들은 후일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채의 가마솥과 아궁이가 단아합니다.

이런 가마솥에 소죽(쇠죽:소에게 먹일 여물과 잡곡 등을 넣어 끓인 죽)을 끓이고,

그 잔불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먹고, 국시꼬랑지(국수를 밀어 칼로 썰고 남은 끝자락)도 구워먹곤 했답니다.

가마의 소죽을 퍼내고 나서 맹물을 채워서 한참을 두면 따뜻한 목욕물이 됩니다.

그 물에 들어앉으면 엉덩이부터 따스함이 온몸으로 전해지며, 코에는 구수한 향기가 올라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잘 발효된 우롱차의 향기 같기도 합니다. 

그 목욕물에는 볏짚과 콩깍지 등을 삶은 물이 섞여 있었을 테니..

요새처럼 비싼 돈 주고 천연입욕제를 사서 쓸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랑채의 뒷쪽에는 나무구유가 놓여 있고요, 그 뒤로 '풍구'의 모습도 보입니다.

풍구를 보니 어린시절 시골에서 보리타작하던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때 그 까끄라기의 괴로움도 이제는 사라져가는 안개처럼 아련한 추억입니다.


사랑채의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있습니다.

이 역시 초가 삼칸으로 중앙에 방이 있고 좌우에 곳간과 외양간이 있습니다.


곳간 앞에는 트고 벌어진 나무절구가 말없이 이 집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랑채의 뒤쪽 대문 옆에 '부속채'라고 명명된 이 집은 옛 헛간을 십 수년 전에 개축한 것이라고 합니다.

깔끔하기는 하나 옛 초가삼간의 맛은 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시간을 거슬러 옛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고, 내 어린시절의 추억을 되새겨 봅니다.

미나리깡에서 낫으로 미나리를 베어서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

어머니의 종아리에서는 선홍의 피가 흘러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머리에 물렸던 것이겠지요~?

지금도 생미나리를 먹을라치면 그 선홍의 피가 떠오르며,

"야야, 거머리 붙어있을라, 잘 보고 먹어래이" 하는 것 같습니다.


햇미나리 맛있게 먹고, 문화유산답사 잘 하고 돌아왔는데..

라디에이터 파손, 주변의 몇 가지 부속품 손상..간죠가 4십 수만 원~ㅋㅎ

봄맞이로 입요기 눈요기 잘했습니다만, 대가는 좀 비싼 편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