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서원과 정유재란
도동서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쌍계서원은 1568년에 세워졌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습니다.
일본 어느 지방의 문인들이 도동서원을 찾아왔습니다.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이 정유재란 때 일본군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전쟁이 끝난 후 이곳으로 옮겨와 1604~5년에 서원을 짓고 보로동서원이라 하였으며,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받고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의 일본군의 우두머리 장수였던 가토 키요마사가 일본으로 돌아가 세운 성이 구마모토성이었고,
성이 완공된 해가 1607년이었으며 그 기념으로 심었다는 은행나무의 사진을 보여주니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나아가 도동서원의 이 은행나무는 공자의 행하지교 즉 학문을 상징하는 나무인데,
구마모토성에 가서 은행나무를 심은 뜻을 물어봤더니, 열매 즉 군사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들려주었습니다.
군사는 뭐하는 사람들일까요?
전쟁하는 사람들이지요.
즉 구마모토성의 은행나무는 전쟁의 상징이라 하면 틀린 말인까요?
잠시 정적 뒤에, "나루호도(과연)!"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웅성거림이 있었습니다.
중정당의 기단 앞에서는 구마모토성 천수각 기단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는 각자의 눈에 따라 다를 것이니 잘 비교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해설은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겼고 질의응답이 이어지면서,
김굉필선생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 중에 강항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강항선생이 예의 그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시코쿠의 애히메로 끌려갔고,
강항선생의 학문에 감탄한 일본학자들이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으며.
그 때의 수제자가 후지와라 세이카와 하야시 라잔이었고,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려지고 있으며,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막부 초대~4대 쇼군의 시강이 되었으니,
급기야 조선성리학이 에도막부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에도시대의 교육시스템이 조선의 교육시스템을 닮게 되었음을 도표로 보여주니 셔터소리가 요란합니다.
연하여 "도동서원의 교육이념이 에도시대 일본의 교육이념으로 승화되어 갔다"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진짜 좋은 공부를 하고 갑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의 팬이 되겠습니다"
라며 명함을 내미는 모습을 보며 진실한 대화가 마음을 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쌍계서원터를 확인하고 표석을 세운 사람과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2000년에 발행된《쌍계마을지》라는 간행물에 이 표석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990년대 후반 수년간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이 간행물의 발행주체는 '쌍계마을지편찬위원회'로 표시되어 있고, 위원장은 장병익씨인데 작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장병익씨가 중심이 된 이 마을자율단체에서 역사문화유적 등 수개소의 표지석을 세우고, 마을의 역사와 정체성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 간행물을 발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때가 테크노폴리스 조성사업이 시작되던 시기로 이 마을이 사업부지에 편입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마을의 정체성을 수호하자는 취지에서 행하여진 일이라 여겨집니다.
장씨가 작고한 이후에는 이 사업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단, 이 간행물의 축간사를 당시 달성문화원 채수목원장이 썼다고 하니, 그 때의 사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