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과 달구족의 흔적...
BC300년경에서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이 분지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 중에서 새를 숭상하는 종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많은 고대인들이 그랬듯이
새를 사람의 영혼을 하늘에 나르는 영물로 여겼을 것입니다.
마침 이 분지에 살던 닭을 신성하게 여겨,
잡아먹지 않고 신에 대한 제물로만 바쳤던 것 같습니다.
닭을 잡아먹지 않으니 닭이 많아졌을 것이고,
닭이 많은 벌판이라고 하여 이 땅을 '달구벌'이라 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구를 위시한 경상도 지방의 방언에
닭을 '달구' 또는 '달'이라 한 흔적이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
즉 닭발을 '달구발'이라 하고,
병아리 즉 닭새끼를 '달구새끼'라 하며,
닭고기는 '달고기',
계란 즉 닭알을 '달알'이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표준어 교육으로 인하여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달(닭) 한 마리 묶어 장에 (팔러) 간다."는 등의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드디어 작은 나라를 세우게 되니,
나라 이름도 땅이름 그대로 달구벌이라 불렀습니다.
지금의 달성공원이 있는 자리가 바로 '달구벌'나라의 서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달성'도 '달구성' 즉 '닭성'에서 유래된 이름일 것입니다.
달구벌판에 '달구벌'나라를 세운 종족의 이름을,
이제부터 '(가칭)달구족'이라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그 달구족의 흔적을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펴고,
여행을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신라의 초기 설화에서도 달구족의 흔적을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입의 모양이 새의 부리와 같았다고 하는 알영부인과,
나정의 우물가에서 말이 그의 탄생을 도와주었다고 하는 박혁거세의 혼인은,
새를 숭상하는 종족과 말을 토템신앙으로 가진 종족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으며,
기마민족 중에서 새를 숭상하는 집단 내에서의 혼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금궤 속의 알에서 김알지가 태어나는 현장을 닭이 지키는 것을 보고,
석탈해가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친 것이나,
김알지의 후손이 신라의 왕이 되고 이후 권력을 세습하게 되는 등의 전승은,
닭을 숭상하는 종족이 여러 종족의 연합체인 신라의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달구벌을 세운 달구족 중 모험심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이 또 다른 세상을 향하여 길을 떠났고,
그러다 도달한 곳이 지금의 경주였으며,
그 곳에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던 세력과 재빨리 결합하여,
급기야 권력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신라를 장악하고도 더욱 새로운 세계를 희구하는 사람들,
혹은 권력핵심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바닷가로 나가 동해를 건넜습니다.
영일만에서 돛을 세워 편서풍을 받으며,
리만해류와 쓰시마(對馬)해류를 타면 저절로 가 닿는 곳이 일본 서해안의 와카사(若狹)만입니다.
와카사만에는 ‘신라로부터 왔다’라는 뜻을 가진 ‘시라키(白木)’라는 마을이 있고,
이곳에는 ‘바다’라는 우리말이 변하여 된 ‘하타(畑)’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 마을에 닭고기와 계란을 먹지 않는 습속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달구족의 본토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풍속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조상을 모신 신사의 이름도 ‘시라키(白城)神社입니다.
시라키 또는 이와 비슷한 지명은 일본의 간사이 지역에 여러 곳이 있으며,
鷄足寺라는 이름의 사찰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鷄足’ 역시 신라의 국호였던 鷄林에서 온 이름이라 하며,
옛 우리말로 풀어 보면 ‘달구발’ 혹은 ‘달구벌’이 됩니다.
이러한 달구족의 渡日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설화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의 이야기입니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 즉 서기 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와 세오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닷가로 나가 바위에 올랐더니 바위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연오를 내려놓았다.
이를 신비하게 여긴 일본 사람들은 연오를 왕으로 모셨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세오도 바닷가로 나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왕비가 되었는데,
이후 신라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 버렸다.
신라왕이 연오에게 사신을 보내 물어 보니,
세오가 짠 비단을 내어 주며 이것을 신라로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사신이 이를 가져와 제사를 지냈더니 빛이 다시 돌아왔다.
그 때 제사를 지낸 장소를 빛을 맞이한 곳이라 하여 영일현(迎日縣)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설화에서 세오의 비단은 양잠과 직조기술의 일본전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혁거세거서간이 양잠을 장려하였다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신라에 이미 양잠과 직조기술이 있었고,
그 기술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전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일본어로 베 짜기 또는 베 짜는 사람을 ‘하타오리(機織)’라고 하는데
‘바다사람’이라는 뜻의 하타와
실의 가닥을 나타내는 우리말인 ‘올’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 짜는 여자를 오리히메(織姬)라고 하며,
세오는 바로 오리히메의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日本書紀에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라는 신라왕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垂仁天皇 3년, 즉 기원 전 26년에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가 왔다.
가지고 온 물건은 羽太玉, 足高玉, 赤石玉, 小刀, 矛, 日鏡, 神籬, 大刀 등 일곱가지였다.
...(중략)...오미(近江)에서 와카사(若狹)를 거쳐 但馬國에 가서 거주지로 정하였다.
近江國鏡村谷陶人들은 아메노히보코를 따라온 사람들이다.
와카사만 안쪽에 있는 쓰루가市의 게히신궁에서 주신으로 모시는
'게히대신'이 바로 이 아메노히보코라고 합니다.
옥과 칼, 도자기 등의 전래는 신라의 문물이 대거 일본으로 전해진 것을 뜻하며,
이 사람들이 모두 일본 고대문화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시라키마을의 하타씨족의 조상은 바로 이 사람들,
아니면 비슷한 경로로 건너간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鏡村谷의 陶人들, 이들이 바로 야요이토기를 만든 사람들은 아닐까 생각되며,
야요이 토기를 보다 보면
일견 대구 팔달동의 토기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이와 같이 달구족은 대구분지에 달구벌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서라벌을 거쳐 바다건너 일본에까지 세력을 뻗은 모험심과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들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토착세력과의 융합을 잘 하는 통합성이 탁월한 종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