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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의 추억

깊은 강 흐르듯이 2022. 2. 14. 11:10

일요일인 어제 오전에 코로나19 PCR검사를 받고 왔습니다.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 중 한 사람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해설사 전원이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가 하달된 것은 토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에 활동을 하는 해설사들은 접촉을 할 일이 전혀 없는데도 전원이 검사를 받으라는 조치는 아무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항의가 있었고, 결국 1~2월 혹한기 근무가 있는 사람만 검사를 받는 것으로 조정되었습니다. 검사 후 22시간 만인 오늘 (월요일) 08:55에 '음성'통보가 온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 칠십을 살면서 참 많은 검사를 받았습니다.

여덟살에 국민학교 들어가니 제일 먼저 하는 검사가 '위생검사'  즉 때검사였습니다. 아침마다 선생님이 손등과 발목의 때와 손톱 발톱을 검사하고 위생이 불량하면 매로 손바닥을 얻어맞곤 하였습니다. 요즘같은 겨울에는 온수가 없어 자주 씻지도 못하여 손등이나 발목의 때가 굳어 갈라져서 피가 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쇠죽을 끓인 가마솥에 물을 붓고 들어앉아서 까끌까끌한 돌로 피떡지 섞인 때를 긁어내던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키와 몸무게 가슴둘레, 시력검사 등을 하는 '체격검사'도 있었습니다. 요즘같으면 어림없겠지만, 남녀 아이들 모두 팬티만 입고 가슴둘레와 몸무게를 재기도 했더랬습니다. '기생충검사'는 당시의 검사 중에서 단연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일명 '회충검사'라고도 했고 '대변검사'라고도 했는데, 대변을 밤알만큼 받아 비닐에 싸고 성냥곽에 넣어서 학교에 갖다 내면 회충약이 지급되고, 약을 먹고 나서 회충이 몇 마리가 나왔는지 세어서 보고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청소검사'와 '숙제검사'는 선생님의 권위를 한껏 세울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습니다. 학교라는 곳에 처음 들어간 날부터 수업 끝난 후 청소는 어김없는 일과였고, 청소를 마치면 선생님의 '검사'를 받아야만 집에 갈 수 있었으니, 청소검사는 곧 '귀가패스'가 되었던 것입니다. 학교에는 반드시 '숙제'가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하고 나서 '검'이라는 동그라미도장을 찍어주거나, 색연필로 동심원을 그려주거나 했는데, 다섯개의 동그라미를 받으면 100점이라는 뜻으로 기분이 최고였지요.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시험에는 필기시험과 '체력검사'가 있었는데, 몸이 허약했던 나는 늘 필기시험에서 잘 받은 점수를 체력검사에서 까먹는 것이 억울했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 때는 필기시험 치고 온 그날 밤에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쌀뜨물을 갈아먹고, 다음날 눈이 빙글빙글 돌면서 체력검사를 받았습니다. 필기시험을 워낙 잘 쳐 놓았기 때문에 합격은 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내 인생의 검사 중에서 좀 희귀한 검사는 '산개검사'입니다.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려서 4초 후에 낙하산이 펴진 것을 확인하는 동작을 '산개검사'라고 하는데요, 그야말로 목숨이 걸린 검사가 바로 '산개검사'인 것입니다. 산개검사의 합격은 곧바로 목숨을 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합격'이면 즉시 예비낙하산의 손잡이를 당기고 다시 한번 산개검사를 해야 겠지요.

회사를 다니고, 작은 사업들을 경영하면서 '검사'와 비슷한 일들은 일상으로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부검사', '회계감사', '세무조사' 따위 모두가 하는 사람은 몰라도 받는 사람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즘 세간에는 감사, 조사, 수사 등의 단어들이 어지럽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고 살피며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자성(自省)'이 절실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