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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下關)로 간 천년의 소리

깊은 강 흐르듯이 2013. 5. 7. 10:40

 2007년 1월 23일

히사노(久野)형은 코쿠라(小倉)역 2층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모노세키(下關)에 있는 스미요시신사를 좀 가 보자고 했다. 저녁때가 다 된 이 시각에 신사엔 왜 가려고 하는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신라종 6구 중 하나가 거기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형은 강에서 게를 잡아 한국에 갖다 파는 사람이다. 어느 강이 어디에서 나와 어느 강과 합쳐지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느 지점에 게가 올라오고, 어디에 다슬기가 많은지 등은 손금 보듯 훤하지만, 신사나 종, 문화재 이런 건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같이 가 주는 사람이다. 이 곳에서 이삼십분 거리에 살지만 지리를 잘 몰라 어디론가 전화를 하여 스미요시신사의 위치를 물었다. 그 사람이 차를 몰고 와서 앞장서 안내를 하였다.


도착한 신사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사무소(社務所)에 인기척이 있었다. 신관(宮司)으로 보이는 사람이 혼자 있었다. 명함을 내밀고, 한국에서 온 문화관광해설사인데, 이 곳에 오래된 종이 있다고 해서 왔으니 좀 보여 달라고 했다. 약간의 뜸을 들이더니 열쇠꾸러미를 가지고 나왔다. 보물관이라고 쓰인 우중충한 건물의 시커먼 철문을 열었다.

순간 목젖에 심한 통증 같은 것이 느껴지며 전신에 소름기가 돌았다. 틀림없었다.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는 순간 한 눈에 우리 종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중충한 건물에 비해 너무 늠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 순간의 이 느낌 하나만으로 이번 여행의 여비 60만원어치가 충분히 되겠다 싶었다.

종은 어린이 키만한 항아리형이었다. 종 중에 항아리형(종 몸체의 중간이 굵고 끝이 오므라드는 형태)인 것은 신라종 밖에 없다. 중국종은 튤립형이고, 일본종은 컵형이다. 우리 종도 고려시대가 되면 컵형이 되고, 조선시대가 되면 튤립형으로까지 끝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종고리 부분의 용은 한 마리이고, 연화문이 새겨진 음통이 보였다. 중국종과 일본종은 용이 두 마리이며, 음통은 우리나라 종 이외에는 없다. 신관에게 음통에 구멍이 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신관은 전에 종루에 걸려 있을 때 구멍이 뚫어져 있는 걸 보았다고 했다.



종의 천판과 종신(종의 몸체)은 각이 져서 뚜렷이 구분되며, 상대가 뚜렷하고 상대 속에 세 겹의 연꽃 모양의 동심 반원, 또 그 속에 당초문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섬세한 모양이 결고운 여인의 약손가락의 지문처럼 보였다. 종의 어깨가 각이 진 것은 신라종에서 고려종까지이며, 조선종은 각이 없이 둥그스럼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종과 일본종은 처음부터 천판과 종신의 구분이 없이 종어깨가 둥그스럼한 일체형이다.




상대의 하단에 돌아가며 네 개의 사각 연곽이 붙어 있고 연곽에도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네 개의 연곽 안에는 각각 아홉 개씩의 육엽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각 연화문의 한가운데에 연봉(연꽃 봉오리)이 솟아 있다. 연봉에도 오므라진 연꽃이 곧 터질 듯한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중국종에는 연봉이나 연곽이 전혀 없고, 일본종에는 연봉과 연곽이 있으나, 세 개의 연곽에 서른 여섯 개씩의 연봉(총 108개)이 있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 연봉을 두고 일본 사람들이 유두라고 하고, 그 주위의 사각틀을 유곽이라 불렀다. 우리가 아직도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고, 연봉과 연곽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종신의 아래 삼분의 일 지점 배부른 부분에 네 구의 비천상과 두 개의 당좌가 새겨져 있다. 비천상은 둘씩의 천인이 마주보며 날아 내려오는 모습이며 지물은 없다. 비천상도 중국종이나 일본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종 고유의 것이다. 당좌에도 세 겹의 육엽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여섯 개의 수술이 하나의 암술을 에워싼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이 소리만 잘 나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신라인들은 이렇게도 섬세하게 연꽃의 모양을 당좌에 새겨 넣었을까?


하대도 약간 두텁게 튀어나오면서 반원의 연화문과 당초문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하대도 상대와 마찬가지로 중국종과 일본종에는 없으며, 신라종과 고려종에 하대가 뚜렷하고, 조선종은 하대가 종의 끝부분으로부터 떨어져 약간 위로 올라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종이 종루에 매달려 있으면 쳐 보기도 하고, 소리도 들어 보고, 두께가 어떤지 만져 보기도 할 텐데, 이렇게 창고 바닥에 놓여 있으니, 아쉽기도 하고, 몰락한 양반의 모습처럼 측은하기도 하다.


이제 이 사람들이 써 놓은 안내문을 보기로 하자. 이 사람들은 이 종을 고려시대의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이겠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종을 신라종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고, 신라종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종으로 보는 이도 있다. 필자의 생각으론 이것이 신라종이다. 우선 전체적인 종의 모양을 보자. 고려종은 끝이 항아리처럼 오므라든 것이 없다는 점에서 항아리형인 이 종은 신라종이 분명해 보이며, 문양, 특히 상.하대와 연곽 연봉의 새긴 솜씨가 신라종의 대표격인 상원사 동종과 너무 흡사한 점에서 또한 이 종이 신라종이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종이 신라종으로 분류되면 현재 남아 있는 신라종은 11구(한국 5구, 일본 6구 소재)가 되고, 이 종이 고려종이라면 현존하는 신라종은 10구(한국 5구, 일본 5구)가 된다. 국내에 있는 것으로 상원사동종, 성덕대왕신종, 청주박물관동종, 선림원지파종, 실상사파종 등 5구이고, 일본에 있는 신라종은 운쥬지동종, 코묘지동종, 죠구진쟈 연지사종, 우사진구동종, 코쿠부하치망구동종, 그리고 논란이 있는 이 스미요시진쟈동종까지 6구이다.


이 종이 보관되어 있는 스미요시진쟈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다. 시모노세키는 예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강제노동자들을 실은 그 한 많은 관부연락선이 닿던 눈물의 항구다. 시모노세키는 또한 조선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이런 눈물의 항구, 원한의 땅에 우리의 혼이 담긴 범종이 와 있을까? 이 종이 언제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묻자 신관은 말을 삼켰다. 이제 그만 이 도시의 또 하나의 명물인 복어회나 먹으러 가야겠다. 시모노세키가 복어로 유명하게 된 것도 역시 이토 히로부미의 공이 크다. 이토히로부미가 고향인 이 곳 시모노세키에 머물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출병 당시 금지시켰던 복어식용금지령을 해제하였던 것이다. 시모노세키에는 이런 말이 있다. 河豚は食いたいし死にたくはないし(복어는 먹고 싶고, 죽기는 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