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연사와 적멸보궁

가을은 깊어가는데..

깊은 강 흐르듯이 2023. 10. 24. 19:49

지혜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극락땅은 여기서 얼마나 될까?
10억만 불국토를 지난 곳에 서방정토가 있다는데..
광속으로 가면 며칠이나 걸릴까?
생각이 생각에 꼬꼬무하지만 알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깊어가는 가을날에 용연사 인악당 쪽마루에 앉아서 극락전 우측면의 벽화를 바라보며 또다시 기나긴 생각에 몸을 맡긴다.

옛날 조선 중기 모년 모월 모일에 하동군수 정아무개가 초도순시차 칠불사를 방문하여 그 유명한 아(亞)자방을 구경하자고 했다.
스님들의 수행처라 보여줄 수 없다고 했으나, 군수는 막무가네로 문을 열게 하였는데..
수행중이라던 스님들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스님, 고개를 처박고 졸고 있는 스님,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스님에다, 방귀를 뿡뿡 뀌어대는 스님 등 천태만상이었다.
화가 치민 군수는 스님들을 혼내 주기로 작정하고, 모월 모일 모시에 동헌 뜰에서 목마타기 시합을 할 테니, 선수를 뽑아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주지스님이 회의를 열고 목마대회 지원자를 모집했으나 지원하는 자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 때 말석에서 얼굴도 낯선 동자승이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모두들 황당하였지만 대안이 없는지라 주지스님은 그 동자승을 목마대회에 내보내기로 하고, 싸리채로 목마를 만들어 주었다.

의기양양해진 군수가 동자에게 물었다.
"아자방에서 하늘을 보고 입을 헤벌리고 있는 중은 뭐하는 것이더냐?"
"예, 그것은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을 하고 있는  것이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늘을 우러러 별자리를 보고 우주의 섭리를 알아내는 수행법이외다"
군수가 당황하여 다시 물었다.
"그러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은 자불(졸)고 있는 게 아니더냐?"
"그 스님은 조는 것이 아니라 '지하망령관(地下亡靈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더냐?"
"지하의 망령들을 구제할 방도를 찾고 있는 것이오이다."
군수가 적잖이 놀라서 또 묻기를
"몸뚱이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는 사람을 뭘 하고 있는 것인고?"
"그것은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라 하오."
"그 뜻을 말해 보거라."
"수행 중인 스님도 여러 유혹에 봄바람에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다가도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연습하는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방귀를 뿡뿡 뀌는 사람은 왜 그러는 것이냐?"
"그런 수행법을 '타파칠통관(打破漆桶觀)'이라 하며, 시커먼 옻칠통을 깨부수는(즉 속이 시커먼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중이라오"
군수가 화들짝 놀라서 명하기를
"그라마, 이제 목마를 타보거라"
동자가 목마에 올라타고,
"이랴!" 하며 목마의 엉덩이를 치자,
싸리채로 만든 목마가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더니, 동헌 뜰을 한 바퀴 돌아 하늘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때서야 스님들은 그 동자승이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이었음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는 것이다.
이 청명한 가을날에 문수의 지혜를 억만 분의 일이라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그 사건으로 군수는 크게 뉘우치고 칠불사에 시주를 많이 했다고 해야 이야기가 끝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