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7.
멋진 사장교를 걸어서 건너가 봅니다.
진도대교입니다.
날이 흐려 희미하게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보입니다.
이 해협이 바로 울돌목이며, 우리나라 해전사상 가장 유명한 명량해전의 현장입니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가 있는 바위산을 올라가 봅니다.
비문의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습니다.
888자의 글씨 중 같은 글자의 글씨체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설사가 힘주어 말합니다.
이 비석은 귀부가 특이한데요,
귀부 자체가 대단히 큰 것은 물론이지만 바위산 꼭대기를 깍아 만든 귀부입니다.
따라서 이 바위산 전체가 이 비석의 비부라는 것이 해설사의 주장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합니다.
바위산 기슭 물가에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의 벽파정이란 정자가 있습니다.
물론 현존 건물은 몇 해 전의 것입니다만, 고려때부터 이 자리에 정자가 있었다고 안내문은 쓰고 있습니다.
벽파진을 뒤로하고 운림산방을 찾아갑니다.
조선후기 남종화의 일가를 이룬 소치 허련(이명 허유)의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운림이라는 이름의 유래나, 이 연못이 오각형이 된 연유를 해설사는 열심히 설명합니다만..
내 귓전에는 시불(詩佛) 왕유의'白雲無盡時(백운무진시)' '空知返舊林(공지반구림)'등의 싯귀들만 맴돕니다.
허련선생의 이명(異名)이 '허유'인 것이 왕유의 '維(유)'자를 따서 붙인 것이며,
호를 '摩詰(마힐)'이라 한 것도 왕유의 호인 마힐을 그대로 따라 쓴 것이라 합니다.
그 만큼 허련선생은 왕유를 대단히 존숭하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또한 왕유의 별장이었던 종남산의 '輞川別業(망천별업)'도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소치선생이 기거했던 집이랍니다.
초가집, 참 오랜만에 봅니다.
내 어린 시절은 모두 이런 초가집에서 살았고,
새 초가집을 지을 때 '알매새끼'를 꼬던 일이 생각납니다.
지붕의 서까래 위에 수수깡이나 지럽(삼대의 껍질을 벗긴 속 대궁이)을 발처럼 엮어서 덮고 흙을 바르는데,
그것을 '알매친다'라고 했고, 그 발을 엮는 새끼줄을 '알매새끼'라고 했던 것입니다.
12살쯤 때의 고사리손으로 새끼를 꼬아 봐야 얼마나 꼬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 어린나이에 우리 집을 짓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그 집에 대한 애착심을 한껏 부풀렸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일주일 전 성묘길에 그 집을 가보고 왔습니다.
소치선생이 쓰던 샘터 돌확이라고 합니다.
위의 것은 세수하고 양치하고, 아래의 것은 붓을 씻고..?
오른쪽 꽃신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전시관에서는 일세를 풍미한 대가의 작품을 만나봅니다.
모두 진품이라고 합니다.
나오는 길에 다시 돌아보는 운림산방의 고운 단풍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낙엽되어 떨어집니다.
떨어진 낙엽이 서럽게도 아름답습니다.
나의 가을도 꽤 깊어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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