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2. 23.(일요일)
대구
참으로 할 말을 잊은 며칠이었다.
이 땅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진정 살아 있는 것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이 순간이 꿈인지 생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운 기나긴 며칠을 보냈다.
대구지하철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부상자들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이 글을 쓴다.
봄방학을 이용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4박5일의 일본 간사이(關西)지방 여행길에 나섰다.
당초 8박9일로 큐슈 일부와 혼슈 대부분을 돌아보기로 예정했으나,
자꾸만 이런 저런 사정이 생겨 차 떼고 포 떼고 하다보니 그렇게 밖에 날짜가 남지 않았다.
'일본 속의 우리 문화 탐방' 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좀 퇴색되고 만 듯하다.
그래도 방학 아니면 꼼짝할 수 없는 중학교 교사인 아내와 고등학교 1학년인 막내녀석과,
이렇게 세 식구가 컵라면 몇 개씩 배낭에 넣고 집을 나설 수 있다는 것은 황송한 일이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군에 가 있는 큰 녀석이 맘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이 지난 설에 휴가를 와서 저는 나중에 제대하고 혼자 배낭여행을 갈 작정이니 이번엔 세 식구가 다녀오라고 했었다.
군대가 남자를 만들고 연애가 여자를 만든다고 했던가?
역시 一理있는 말이다.
오사카
김해국제공항을 출발한지 1시간 5분 여를 날아 비행기는 關西국제공항에 도착했다(왕복항공료 : 359,000원, 간사이공항세포함).
간사이공항은 일본판 정경유착형 부실 공사의 모델이라 일컬어진다.
일본에서 대형 토목·건축공사는 무조건 공사금액의 10%가 정치권 보스들의 손으로 넘어가며,
그 돈이 계열의 꼬붕 정치인들에게 분배되고, 비로소 예산 승인을 얻어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야쿠자 세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오야코(親子)관계가 일본의 정치시스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에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것 때문에 정치시스템에 관한 한 일본이 우리 나라보다 훨씬 비민주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AIRBUS-300은 스무스하게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KAL 조종사들의 착륙솜씨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우선 일본 땅에 소금기를 좀 보태주고 나서, JR關西空港역에서 快速列車를 타고 오사카의 天王寺역으로 갔다(요금 1,050엔, 소요시간 50분).
四天王寺
天王寺역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어서 일본 최초의 사찰이라고 하는 시텐노지(四天王寺)로 갔다(관람료 성인 300엔, 학생 200엔).
서기 593년에 세워진 이 四天王寺는 아스카(飛鳥)市에 있는 아스카지(飛鳥寺)와 함께 서로 일본 최초의 사찰이라고 하는 절이다.
기록에 의하면 飛鳥寺는 596년에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발원 및 건축을 시작한 것은 飛鳥寺가 먼저라서 일본 최초의 사찰은 飛鳥寺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절의 맨 입구에는 커다란 석조 토리이(鳥居)가 서 있는데, 주로 신사의 입구에 있는 토리이가 절의 입구에 있는 것이 특이하다.
토리이의 편액에는 '釋迦如來 轉法輪處 當極樂土 東門中心' 이라 씌어 있어, 여기가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장소이며,
극락 (서방정토)의 동쪽의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안내서에는 '절에 토리이가 있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되겠지만,
원래 토리이는 聖地結界의 四門으로서 고대 인도에서부 터 세워진 것으로 신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되어 있다.
(시텐노지의 토리이 : 오사카시)
토리이는 '새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고, 그 형상은 '하늘 天'字를 닮아 있다.
동양의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천신숭배사상'과
새를 인간의 영혼을 하늘에 전하는 매개자로 신성시하는 데서 생겨난 '鳥葬'의 풍습 등에서 유래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중국의 도교나 불교 사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삼문과
우리 나라의 사당입구 등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의 모습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될 것 같다.
(중국의 소수민족 백족의 삼문 : 운남성 곤명시)
(남명 조식선생을 제향하는 덕천서원 입구의 홍살문 : 경남 산청)
모두가 신성시되는 공간의 입구에 세워지며, '하늘 天'字 모양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토리이를 지나서 금당으로 향하면 우선 커다란 문이 나 타나는데, 보기에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듯한 이 문은 극락문이다.
이 문의 기둥에는 다른 절에서 보기 드문 또 하나의 기이한 물건이 있다.
수레바퀴 같이 생긴 것을 네 기둥에 달아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한 번씩 돌리고 절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텐노지 극락문과 전법륜 : 오사카시)
이것이 '轉法輪'이란다. 이 곳 부처의 세계를 방문하는 중생은 이것을 돌리며 "부처님의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인사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입장권을 사서(일반 300엔, 학생 200엔) 금당영역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금당이 자리잡고 그 앞에 五重塔(오층탑)이 높이 서 있으며, 가장자리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금당 안에는 구세관음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고, 사천왕이 사방을 수호하고 있다.
금당은 얼른 보고 오층탑(木塔) 쪽으로 향했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 단숨에 오층까지 올라갔다.
(시텐노지 오층탑 : 오사카시)
탑 속에 감실을 만들고 감실 속에 또 작은 탑을 만들어 넣고 그 속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고 씌어 있었다.
잠시 합장을 하고 돌아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허벅지 근육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난간을 잡고 겨우 지상으로 내려와 바깥의 돌계단에 주저앉아서 초콜릿 두 개를 까먹고 나서 간신히 다리를 펴고 일어설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신성한 당신의 세계에 너무 함부로 요망하게 다가간 죄를 물으신 건가 보다.
아직도 발걸음을 뗄 적마다 뭉쳤던 근육이 면도칼로 째는 듯하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천천히 회랑을 돌아 금당영역을 뒤로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니까 금당영역만 유료이고, 그 바깥쪽은 모두 무료관람이었다.
아픈 다리를 달래가며 천천히 외곽을 돌아보았다.
사천왕사에는 종루가 두 곳이 있다는데, 먼저 남종루가 나타났다.
종루의 아래층에 예의 사이센바코(賽錢箱:복전함)가 맨 앞에 버티고 있고, 그 뒤로 밧줄이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종은 보이지 않았다. 일층의 천장이 막혀 있고 조그만 구멍으로 밧줄만 내려와 있었다.
어째서 종은 보지도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남종당을 지나니 태자전이 있었다. 성덕태자를 모신 곳이다.
일본 불교를 얘기하려면 성덕태자를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성덕태자는 6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일본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推古)천왕의 조카로서 섭정을 맡아 일본에 불교를 공인,
장려한 일본 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이 곳 시텐노지도 그가 창건했으며, 아스카지와 호류지 모두 그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구려에서 건너간 승려 혜자스님이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다고 하니, 그는 한국불교를 일본에 받아들인 인물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절에 가면 부처님보다 성덕태자에게 더 많이 참배를 할 정도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한다.
아침저녁 여섯 번 예불을 드리는 六時堂에는 약사여래와 사천왕이 모셔져 있고,
공양과 납골행사를 행하는 곳이라 하며, 전각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건축물이라 한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주심포양식을 한 고색창연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건물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듯하며, 포작의 결구가 매우 엉성해 보이는 등 그리 아름다운 건물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분 정도 간격으로 계속해서 들리는 가느다란 종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북종당이라 쓰인 전각이 나타나고, 종루 아래층에 사람들이 앉아 머리를 숙이고 있고, 스님이 밧줄을 당겨 종을 치고 있었다.
시주한 사람들을 축원해 주며 계속 종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종루는 예쁜 모습이지만, 종소리는 그리 맑지 않았다.
소리에 여운도 없었다.
일본 불교가 다 그렇다지만, 너무 기복신앙화된 모습 아닌가 싶었다.
(시텐노지의 북종루 : 오사카시)
일체 중생에게 원음(원만한 소리, 즉 부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범종을,
시주한 개개인의 복을 빌어주기 위해 계속해서 치고 있는 모습이 왠지 경박해 보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종의 모습은 역시 보이지 않고, 조그만 구멍을 통해 종루 바깥쪽으로 들락거리는 야윈 당목만 측은하게 보였다.
오사카성
일본의 3名城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오사카성으로 갔다.
지하철역에 내리자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젊은 사람들이 떼거리로 어느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고,
역계단에는 '티켓을 양도해 주세요' 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서 있는 여자아이도 있고,
도로변엔 포장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다코야끼(찹쌀풀 반죽에 낙지다리를 썰어 넣고 구운 일본 음식) 따위를 팔고 있는 것이,
무슨 축제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몰려가던 사람들이 성 앞의 콘서트 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인기가수의 공연이 있다고 했다.
직장을 파하고 오느라 좀 늦은 OL들이 마구 뛰고 있었다.
무다리 끝에 끼워진 구두 굽 소리들이 콩을 볶는 듯하였다.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그 이름에 원한이 하늘같건만 이 곳에 들르는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오사카성은 규모나 축조 양식 등에서 매우 웅장한, 남성적인 맛이 있는 성으로 꼽힌다.
엄청나게 넓고 깊은 해자(적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도록 성의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 놓은 시설)와,
높은 성벽 그리 고 수십 톤 짜리의 성돌들의 위풍은 언제 봐도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오사카성 : 오사카시)
거대한 천수각의 금박들이 저녁햇살을 받아 번쩍이는 모습은 대단하지만,
어쩐지 기품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편견은 아닐 터이다.
이런 모습은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미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다도(茶道)선생이었던 센노리큐(千利休)는 화려함만 추구하는 히데요시의 미의식을 천박하게 여기게 되고,
히데요시는 끝내 모반의 죄를 씌워 스승에게 할복의 명을 내린다.
와비(소박한)다도를 완성한 센노리큐는 辭世의 句(세상하직의 글)를 남기고 70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사카성은 자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교토의 이조성과 비교가 된다.
마루에 올라서서 걸으면 발을 옮길 때마다 새소리가 나는 것으로 유명한 이조성은 그 구조가 치밀하고 섬세하며,
전형적인 일본식의 아기자기한 정원을 조성해 놓고 있다.
해자와 성벽도 그리 넓고 높지 않다.
웅장한 천수각도 없다.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성품이 성의 모습에 빗대어 비교되기도 한다.
성곽은 중국 商, 周나라 때부터 축조되었다고 한다.
고대의 성곽은 왕이나 수장의 거처를 방어하기 위한 內城(이것을 城이라 하였다)을 축조하고,
내성의 밖에 다시 外城(이것을 郭이라 불렀다)을 쌓고 군사나 주민의 주거를 방어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城과 郭의 개념은 혼동되고 합쳐져서 城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줄여서 그냥 城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후일 중국에는 국토 전체를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할 목적으로 長城이 축조되었고,
(만리장성 : 베이징)
우리 나라에서는 읍락의 주민을 지키기 위한 읍성이 발달하였으며,
(낙안읍성 : 전남 순천시)
일본에서는 쇼군이나 다이묘의 거처 자체를 城으로 축조한 내성이 대부분이다.
성곽이 발달한 모습도 나라마다 정치와 군사체제 그리고 전쟁 및 외교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다이이치(大阪第一)호텔
오사카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
(트리플룸 1박 조식포함 24,200엔)
(오사카다이이치호텔 : 오사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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