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서기 261년에 신라의 나마 극종이라는 사람이 달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가 달구벌이 서라벌 즉 신라에 합병된 시기일 것으로 보입니다.
달구벌나라의 수도였던 그 자리에 지금도 남아 있는 달성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고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 공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달성공원 주변에 있었던 비산동고분에서는
금동관과 신라계의 토기와 철제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대구박물관에는 비산동고분 내부의 모형을 만들어서,
유물들을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불로동에서는 200여기의 많은 고분들이 발견되었는데,
5-6세기에 조성된 신라양식의 고분들이며,
발굴된 고분에서는 역시 신라계의 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서라벌의 후예 신라는 이렇게 같이 닭을 숭상하고,
어쩌면 한 조상의 나라였던 달구벌을 병합하는 외에,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병합하고,
탁월한 주민통합능력을 발휘하여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포용성과 진취성에다 모험심까지 겸비한 신라는
당나라와의 군사연합 등의 모험을 감행한 끝에
엄청나게 더 넓은 국토를 가졌던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끝내는 힘을 합쳤던 당나라까지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하였습니다.
신라인은 손재주가 아주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라문화를 함축하여 말한다면 금과 돌의 문화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금을 다루기를 떡주무르듯 하였던 것 같습니다.
천마총에서 나온 신라금관은 기술적으로나 모양으로나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대구 비산동고분에서도 경주지역에서 보이는 신라왕관과 같은 양식의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석굴암의 불상을 보면
돌로 만든 미술품으로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할 만큼 석조미술의 최고봉입니다.
대구 동화사 입구의 마애불좌상의 편안한 미소와 비로암 삼층석탑,
그리고 군위 삼존석굴 등에서도 신라인의 돌 다루는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구는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대였습니다.
서쪽의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대가야 땅이었던 고령에 닿습니다.
가야를 세운 김수로가 인도에서 왔다는 설화가 있기도 합니다만
가야는 신라와의 공통점도 물론 많지만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문화를 한 마디로 말하면 흙과 쇠의 문화입니다.
일찍이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제철기술을 가장 발달시킨
가야사람들은 불을 다루는 특별한 혼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불의 혼으로 빚은 가야 토기는 쇳소리가 나는 그릇이라 하여 쇠기라고 불렸습니다.
가야토기의 기술은 쇠기라는 말과 함께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일본에서 토기를 스에키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토기와 철을 매개로 한 가야와 일본의 거래는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대구는 물론 신라의 영역이었지만,
국경의 개념이 희박하였던 당시로서는
낙동강을 건너서 가야와의 인적 물적 교류는 많이 일어났을 것이며,
가야가 신라로 병합된 뒤에는 낙동강을 공유하면서 양문화융합의 전초지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대구는 신라문화와 가야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문화다양성의 지방으로 발전하는 기틀이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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