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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과 대구사람

충절의 고장, 달구벌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3. 1. 14.

이 외에도 대구사람들의 우국충정의 기상은 역사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의 군대는 대구 팔공산에서 운명의 일전을 치르게 됩니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자, 주군인 왕건을 탈출시키고 대신에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장군이야말로

이나라 역사 제일의 충절의 표상일 것입니다.

장군이 전사한 지묘동에 사당을 세우고 그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동화사 대웅전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봉서루의 뒤편 처마밑에는

 

‘영남치영아문’이라고 쓰인 조그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것은 ‘영남지역 승군의 지휘소’라는 뜻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대구의 동화사에 사명대사가 이끌던

승군의 지휘본부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월성동의 월곡역사공원에 가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우배선장군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만촌동에 있는 망우공원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던 홍의장군 곽재우의 동상이 우뚝 서 있으며,

  

임란의병관에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자세한 활동내역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대구가 의병활동의 중심지역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3.1운동 당시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으며, 

그 때 행진을 감행하였던 옛 동산병원 솔밭길을 

‘삼일운동길’로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진홍의사 폭탄투척사건, 

 

대구사범학생들의 반딧불회사건, 

 

대구공립상업학생들의 태극단사건 등은

목숨 바쳐 정의를 지키려는 대구사람들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란 당시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승군의 지휘본부가 있었으며, 

국채보상운동이 이곳에서 발발하는 등 

예로부터 대구사람이 저항정신이 강한 것을 알아차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구를 저항정신 말살의 전초기지로 삼게 되었습니다. 

1905년에 옛 달구벌의 수도이며 달벌성이 있어 대구사람들의 정신적 고향이었던 달성에

신사를 만들고 신사주변을 공원화하여 이른바 ‘신사참배’를 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구읍성을 허물고 객사를 뜯어내어 민족정기의 말살에 돌입하게 됩니다.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을 탄압하여 무산시키고 난 1909년에는 

초대총감 이토히로부미는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를 모시고 달성공원에 와서 

신사 앞에 기념식수를 하였습니다.

유교예법상 안쪽에서 보아 윗자리인 왼쪽에 히로부미 자신의 나무를 심고, 

아랫자리인 오른쪽에 황제의 나무를 심게 하여, 

이 나라 민족정기말살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달성공원에는 그 때 그 나무가 심은 이의 마음처럼 

비틀어진 악목으로 자라 당시의 치욕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옛 성현은 

“목이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말며, 몸이 더워도 악목의 그늘에는 쉬지 말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달성공원에는 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왕산 허위선생의 순국비와 

석주 이상룡선생의 애국비도 세워져 있으며, 

대구가 낳은 민족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전국최초의 시비로 건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제에 항거하였던 저항시인의 시비 주위에 

일본의 상징인 벚꽃을 잔뜩 심어 놓은 것은 그리 마뜩지가 못합니다.

 

약사불교의 실용정신과 신라의 기술, 가야의 장인정신을 이어받은 대구에는 

일찍이 산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나라 최초로 생겨난 대구약령시는 어느덧 대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서문시장 또한 전국의 3대 시장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면서 

대구가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산업화시기에 대구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발전하였던 섬유산업은

 

박혁거세가 장려하고, 세오녀가 일본에 전해 주었던 

2,000년 전의 그 양잠 및 직조기술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2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대구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세력을 뻗었던 달구족의 

개척과 포용의 정신을 이어받은 통합성의 도시입니다. 

약사불교의 실용정신과 신라인의 장인정신은 

대구를 실용적인 상공업의 도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야인의 뜨거운 불의 혼과 

사육신의 충절 

그리고 도학의 실천정신을 계승한 대구는 

실천력 강한 정의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에 와서 참으로 많은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초원의 집 화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 

상인동 지하철공사장 폭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서문시장의 대화재들...... 

이 모든 참담한 사건들이 우리가 2만년을 면면히 이어온 대구의 얼, 

대구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소홀히 하는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의 얼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곧추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살면 안전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대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사랑 얼사랑,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F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