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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과 대구사람

국채보상운동과 대구의 아이덴티티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3. 1. 16.

지금부터 100년전, 1907년에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진 나라빚 1,300만원을 2천만 국민이 석달만 담배를 끊어 그 돈으로 갚자고 하는 '경제주권회복운동'이었다.

서상돈, 김광제 두 선생에 의해 제창된 이 운동은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구 도심에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종각을 지어 달구벌대종을 만들어 걸었다.

이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대구 남일동의 진골목을 중심으로 활동에 나선 7부인의 모임인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가 여성국채보상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국채보상공원에 대구 여성국채보상운동 기념 비석을 세우고,

'경고, 아! 부인동포라.'

라는 당시의 격문을 새겨 넣고 이름도 없는 여성들의 갸륵한 정성을 기리고 있다.

1907년 1월 29일 광문사(김광제.서상돈 선생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인쇄.출판사)에서

서상돈선생이 최초로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하였다.

당시의 국채 1,300만원은 정부의 1년 예산(1907년 세출예산 1,395만원)과 맞먹는 거액이었다.

(2006년 정부세출예산은 144조 8천억원)

광문사의 옛터인 이 곳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없어 안타깝다.

뿐만 아니라 계산동에 있었던 서상돈선생의 고택도 하필이면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되는 때의 직전에

아파트 공사 때문에 헐려 나갔다니 참으로 아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1907년 2얼 21일에는 북후정(현 대구시민회관 자리) 앞에서 대대적인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북후정 자리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세우고, 2월 21일을 국채보상기념일로 하였다.

기념비 앞에서 한 학생이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문' 을 큰 소리로 낭독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2만년 대구역사를 통해서 대구의 아이덴티티가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사건이었다.

대구의 정신적 고향 '달성'은 영광과 오욕의 대구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2천년 전 '달구벌'소국의 터전이었으며, 3백년 영남의 수도였던 대구 달성에,

일제는 신사를 세워 '한민족의 정기'와 '달구벌의 얼'을 말살하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달성공원에 세워졌던 '대구신사'의 정문인 도리이의 모습. 사진 오른쪽에 '大邱神社'라고 쓰인 돌기둥이 보인다.

일제는 이곳에 가서 소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하도록 강요하며 민족혼의 말살을 기도하였다.

탄압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저지된 1908년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황제를 모시고 대구 달성에 들러 기념식수를 하였다 하는데,

그 때 그 나무로 추정되는 두 그루의 향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 쪽에서 보아 왼쪽(左上右下의 유교 법칙상 상위)의 비틀어져 자란 것이 이토 히로부미의 나무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황제보다 윗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내력이 이렇건만 여름이면 그래도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이 나무를 당장 베어내었으면 속이 시원하련만, 그러나 그 문제는 좀더 범시민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목이 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말며, 몸이 더워도 악목(惡木)의 그늘에는 쉬지 말지어다."

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