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대구)을 이륙한 비행기는 30분 만에 나노구니(후쿠오카) 상공에 다다릅니다. 2017. 5. 15.
나노쿠니(奴國, 那國)는 후쿠오카의 옛 이름이며, '나(那)의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옛말의 '나(那)'는 강의 어귀를 뜻하는 말로써,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고 합니다.
특히 한반도의 남부지방에서는 낙동강 하구지역을 일컬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노쿠니'는 '신라와 가야의 남부지방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뜻이 됩니다.
나노쿠니의 흔적은 지금도 여러 군데 남아 있습니다.
후쿠오카시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나카가와((那珂川)이며,
이 강의 어귀에 생겨 있는 섬이 나카스(中洲)인 것은 나노구니라는 옛 나라이름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후쿠오카공항은 이타즈키(板付)에 있어서 일명 이타즈키공항이라고도 합니다.
공항이 건설되기 전 이 곳 이타즈키에서 겨(벼의 껍질)자국무늬의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야요이토기 중 최고(最古)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토기의 발견을 두고 "후쿠오카의 새벽"이라 부르기도 하고,
이타즈키유적 발굴을 가리켜 "나노구니 발굴"이라고 명명하는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즉 한반도의 도작(稻作)문화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일본의 야요이시대를 열었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일 것입니다.
이타즈키의 바로 남쪽에는 가스가(春日)시의 북쪽 스쿠오카모토지역에서 한 농부가 커다란 돌 밑에서 붉은색의 옹관을 발견하였고,
이후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동경, 동모, 동과, 옥류들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유적을 스쿠오카모토유적이라 부릅니다.
이 커다란 돌은 바로 남방식고인돌이었고, 이후 많은 고인돌들이 규슈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후쿠오카항을 방파제처럼 막아서 있는 시카노시마(志賀島)에서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겨진 금인(金印)도 발굴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의 국보가 되어 있는 이 금인이 말해 주는 것은 나노구니의 왕은 한반도 사람이었고,
죽어서 한반도와의 통로에 있는 이 시카섬에 묻히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침 식전에 산보삼아 스미요시신사를 둘러보러 갔습니다. 2017. 5. 16.
안내판에 쓰여 있듯이 전국에 2129개사가 있을 정도로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 어딜가나 스미요시신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스미요시신사는 스미요시삼신과 神功皇后를 모신 신사라고 하지만, 그 안에 또 다른 많은 신사들이 합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가(志賀)신사나 이나리(稻荷)신사 등이 퍼뜩 눈에 들어옵니다.
이나리신사의 도리이(鳥居)에는 시라히게(白자)이나리신사와 아라쿠마(荒熊)이나리신사라는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나리(稻荷)신은 곡식의 신 즉 도작(稻作)문화를 전해 준 신이며, 시라(白)는 신라를, 아라(荒)는 가야를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신사는 신라와 가야로부터 도작문화를 가져다 준 사람들, 즉 우리의 조상신을 모신 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가, 스가, 스구 등의 이름을 가진 신사들은 옛 우리말의 스쿠(마을의 뜻)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하며,
니혼쇼키(日本書紀)나 고지키(古事記) 등의 일본사서에도 등장하는 스사노오노미코토 또는 그의 별칭인 시가, 스가대신을 모신 신사들입니다.
사서에서의 스사노오노미코토는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었다고 하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바다를 건너온 신' 즉 '외래신'을 총칭해서 부르는 이름으로 변모되었다고 합니다.
위 안내판에서 시가신사(志賀神社)는 항해 및 해상안전을 기원하는 신사로 되어 있지만,
이 역시 원래는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가 세운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신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일본의 새로운 문명시대 즉 야요이시대를 연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사라고 하면 일제강점기의 강제 신사참배와 전범을 합사하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의 이미지 때문에 거부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일본의 신사에 모셔져 있는 신들, 특히 오래된 신사의 신들은 우리의 조상신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데, 이타즈키로부터 후쿠오카의 새벽은 밝았고, 나노구니(후쿠오카)에서 일본의 여명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구를 자주 방문하고 대구의 아름다움을 일본에 소개하는 블로거 한 분이 이 곳 후쿠오카에 거주하고 있는데,
온전히 종일 안내를 해 주겠다고 흔쾌히 차를 몰고 와 주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5년여 전부터 연락이 끊어진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이번 여행의 주목적입니다.
그 친구의 고향은 옹가강(遠賀川) 가에 있습니다.
후쿠오카현을 북북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이 강의 서쪽을 옛날에 치쿠젠(筑前)이라 불렀고, 동쪽을 치쿠고(筑後)라 불렀습니다.
즉 치쿠시국의 앞쪽지방과 뒤쪽 지방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앞과 뒤는 어디서 보는 것을 기준으로 할까요?
옛날에는 일본 땅의 여러 지역을 우리나라 쪽에 가까운 쪽에 젠(前)을 붙이고, 먼 쪽에 고(後)를 붙여 불렀습니다.
이곳 치쿠젠과 치쿠고를 비롯하여, 오이타현의 부젠(豊前)과 분고(豊後), 나가사키와 구마모토의 히젠(肥前)과 히고(肥後),
후쿠이현의 에치젠(越前), 도야마현의 에치쥬(越中), 니가타현의 에치고(越後) 등 하나같이 우리나라쪽에 가까운 지방을 앞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름이 붙은 지방은 주로 한반도 사람 즉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일본땅 전체를 두고 동쪽 즉 태평양쪽을 오모테니혼(表日本),
서쪽 즉 동해쪽을 우라니혼(裏日本)이라 하여 앞뒤를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옹가강 유역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옹관(甕棺:가메캉)묘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옹관묘는 물론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강이름도 일반적인 음독인 엥가(遠賀)로 읽지 않고 '옹가'로 읽는다는 것입니다.
이 옹가강 유역에는 꽤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우리 조상들이 건너가 개척하기 좋은 땅이었고,
사람이 죽으면 우리땅에서 하던대로 옹관을 만들어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상의 신을 스가대신(마을 또는 바다의 수호신), 이나리대신(도작의 신) 등으로 부르며,
이들 신을 제사지낼 신사를 짓고 스가신사, 이나리신사 등으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묻지마라 갑자생, 선고께서 종전 1년전인 1944년 규슈의 탄광으로 끌려갔다가 한 달만에 탈출하여 떠돌다가 도착한 곳이 이 들판이었고,
지금 찾아가는 친구의 할아버지에게 구출되어 목숨을 부지한 곳이 또한 이 옹가강가의 그 집 농가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지명도 바뀌었지만, 70여년 전 당시만 해도 이곳은 가라쿠마(唐熊)라고 불렀고, 지명으로 봐서 가야사람들이 개척한 땅이 틀림없습니다.
그 때의 그 집에는 그 친구의 누나가 살고 있습니다. 초인종을 눌러보니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곳에 그 친구의 삼촌이 살고 있었기에 그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삼촌과 숙모는 모두 작고하였고,
친구 사촌의 부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친구의 행방은 잘 모른다면서 앞의 누나의 딸 즉 친구의 생질녀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녀도 친구의 행방은 잘 모르지만, 어머니는 알 것이며 멀리 외출한 것 같지는 않으니 곧 돌아오실 거라고 하여,
다시 그 누나의 집으로 가니 과연 누나는 돌아와 있었고, 단번에 알아보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친구의 행방을 물으니, 들판 건너로 보이는 저 산 어디에 들어가서 산다는데, 자기도 가 보지는 못했다며,
그 곳을 알고 있다는 이웃 노인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웃 어른 두 분이 같이 가 보자며 차를 몰고 앞장서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바바야마(馬場山)라는 산 아래 막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산 입구는 잡목숲길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스기와 히노키의 원시림 우거진 험한 산길이 나타났습니다.
총중에 재빠른 노인이 먼저 올라가서 찾아볼 테니 뒤처지는 사람들은 천천히 올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참 후에 두 노인이 통화하며 친구를 찾았다고 했고, 너무 높고 험한 곳이니 지금 있는 곳에서 기다리면 친구와 내려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 참을 기다린 끝에...
친구를 만나 뜨겁게 포옹을 하였습니다. 만 5년 만의 재회입니다.
산 속에 산다기에 도적같은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안색이 너무 맑고 편안해 보입니다. 안심입니다.
어디 사느냐고 물으니...
저 산 깊숙한 곳에 절이 하나 있는데, 주지가 죽고 없는 빈 절이라 거기서 그냥 눌러산다는 것입니다.
승려가 된 것도 아니고, 종단이나 이런 곳에서 무슨 간섭하는 일도 없어 편안하게 살고 있으며,
가끔 절을 찾아오는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한다니 수행이 상당 경지에 이른 듯해 보입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신과의 대화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연락도 되지 않았느냐고 하니, 그 절은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충전을 할 수 없으니 휴대전화도 없애버린 것이 연락이 끊어진 까닭이었습니다.
"아~ 그랬었구나!"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쯤씩 산아래 마을로 내려와 필요한 것들을 챙겨 올라가곤 한다며,
연락이 필요하면 이 동네 아주머니에게 전화하거나 편지를 하면 보름쯤 후에는 자기에게 전해질 것이라며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총총히 다시 산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렇듯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어버린 친구를 찾은 데에는 후쿠오카의 '대구블로거'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대규모의 환호유적과 한반도유물들이 출토된 요시노가리유적공원을 가려다가 버스를 놓치고, 시내를 다시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2017. 5. 17.
구시다신사(櫛田神社)를 다시 갔습니다.
이 신사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어서 민족감정상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또 이 신사에는 수령이 천년이 넘었으며 후쿠오카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구시다의 은행'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경내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데,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를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후쿠오카 사람들은 이 신사와 은행나무를 후쿠오카의 상징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나무 아래에 비석이 세워져 있고, 크고 무거워 보이는 기다란 자연석이 두개 놓여 있습니다.
바로 몽고군의 침입 때 몽고병선의 닻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몽고군을 원구(元寇)라고 불렀고,
대마도를 휩쓸면서 대마도주를 죽이고 규슈까지 밀어닥쳤는데..그 날 밤 폭풍이 불어 수많은 병선과 병사들이 수장되었습니다.
이 폭풍이 그 이름도 유명한 가미가제(神風)라는 것 모두 잘 아시지요?
그 때의 병사들 중에는 몽고군이 징발한 조선병사들도 다수(5천~1만명) 포함되어 있었다니...
이 무거운 돌덩어리와 함께 차가운 바다 속으로.. 다시 한 번 돌덩어리가 돌아다보입니다.
이래저래 이 구시다신사는 우리에게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곳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사의 이름과 모시고 있다는 신들의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역시...
구시(櫛:빗)는 빗살무늬토기(한반도의 신석기토기)와 관계가 있다고 하기도 하고, 구지봉(가야의 수로왕전설의 장소)과의 관련설도 있습니다.
오이타현에 있는 규슈에서 제일 높은 산의 이름도 구쥬산(九住山)이며, 규슈(九州)라는 섬이름 자체도 구지(龜旨)와 관련짓는 설이 있습니다.
오이타현은 옛날에 후고쿠(豊國:풍족한 나라)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도 한국(韓國:옛 삼한)에서 유래한 것이란 설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는 일본서기에서 다카마노하라(高天原)를 다스리는 신이라고 하는데,
이 다카마노하라 역시 한반도 남부의 어느 고원지대 쯤으로 비정하는 이가 많으니,
아마테라스오미카미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의 조상신일 것입니다.
일본왕실의 조상인 天孫이 강림할 때 天照大神은 세 딸을 보내 천손을 마중하게 했는데,
그 마중장소가 후쿠오카현 무나가타(宗像) 앞바다의 세 섬(오시마, 지노시마, 가쓰시마)이었고, 이 세 여신을 모시는 신사 즉,
무나가타다이샤(宗像大社), 오리하타진쟈(織幡神社), 무나가타다이샤나카쓰미야(宗像大社中津宮)가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
시가다이진(志賀大神)은 앞서의 스미요시진쟈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의 마을 수호신이었는데,
지금은 이 곳에서 항해와 해상안전을 수호하느라 고생 많이 하고 있군요.
날이 더워 땀을 식힐 겸 나카강으로 나가 봅니다.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 강의 어귀에 다다랐고, 연안을 개척하여 정착하고 자손을 퍼뜨렸고, 그 자손들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며,
토착민(죠몬인)을 제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피를 썪기도 하면서 미야코(都:나라 교토지방))로 입성하여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天孫降臨과 神武東征신화가 되어 여러 사서에 나타난 것입니다.
강의 한복판에 보이는 뾰족한 곳이 강이 갈라지며 만들어진 삼각주인 나카스(中洲)의 시작지점입니다.
옛 나노쿠니의 중심지였을 이 나카스가 지금은 밤의 천국입니다. 주점과 마사지숍이 즐비한, 일본 전국에서도 이름난 환락가입니다.
섬의 시작지점에 높다란 석등롱이 서 있고 기단에 "魚市場"이라 새겨져 있어 이 곳이 옛날에는 수산업의 중심지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강의 좌측(서쪽)을 텐진(天神)이라 하며 무인들이 살았고, 우측(동쪽)을 하카타(博多)라 부르며 상인들이 많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나카스의 서쪽 강변에는 밤이 되면 야다이(屋臺: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들어서는데..6-70%가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집이라니..
또 하나의 나노쿠니의 부활인가 몰라도 마음 한구석은 좀 그렇습니다.
오른쪽(동쪽)으로 갈라지는 강물 주변을 개발하여 복합관광단지로 조성한 곳이 캐널시티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공간을 희한하게 조합하여 환상적인 상업공간을 만든 것은 분명 초현대 일본사람들일 텐데,
이 곳에서 왁자지껄 들리는 말은 거의가 한국어와 중국어입니다.
또 하나의 시대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여 생각이 깊어집니다.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어제 함께 다녔던 그 블로거의 메신저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이 朴先生 생일 아니냐고..저녁을 먹자"고..
블로거가 결혼이후 30년 동안 애용하고 있다는 소바집에서 국물이 따뜻한 소바로 저녁을 먹으면서..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 실제 오늘 내 생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쨌던 한 번 더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직고를 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 "페이스북에서 다른 朴상의 생일포스팅을 보고 朴先生의 생일로 착각했었다고..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고..ㅎ
이제 나노쿠니의 텐진을 뒤로하고, 6시 31분 후쿠오카공항국제선행 버스를 기다립니다. 2017. 5. 18.
공항의 식당 이름에서도 나노쿠니(那國)의 흔적을 또 봅니다. "나노후쿠"라는 라면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아침부터 라면은 속이 쓰릴 것만 같아, 조정식을 시켰습니다.
창너머로 활주로가 보입니다. 저 땅 속엔 아직도 우리 조상의 유물들이 비행기 소리에 잠들지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새 낙동정맥의 산들이 보입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