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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넘어 바다건너

와카야마의 낮과 밤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8. 3. 25.

간사이(関西) 상공을 비행하는 것도 참 오랜만입니다.

녹동서원에 모셔진 김충선(사야카) 장군과 관련 있다는 와카야마의 마고이치마쓰리(孫市祭り)를 보기 위해 시간을 쪼갰습니다.

간사이공항에서 와카야마(和歌山)시까지 40여킬로, 오사카(大阪) 중심가까지의 50킬로보다 가깝습니다.

와카야마의 옛이름은 기노구니(紀國)였습니다.

즉 기(紀)씨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훗날 기이노구니(紀伊國) 또는 이를 줄여서 기슈(紀州)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여러군데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기씨는 누구였을까요?

백제의 8대성씨 중에 목(木)씨가 있었는데, '木'의 일본어 훈독은 '기(き)'가 됩니다.

시간이 흘러 발음이 같은 '紀'자를 쓰는 성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즉 백제사람들이 건너가 개척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또 이 사람들이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가 기슈이치노미야(紀州一宮)라 불리는 히노쿠마진쟈(日前神社)입니다.

'日前'이라 써 놓고 '히노마에' 또는 '니치젠'으로 읽지 않고 '히노쿠마'라고 읽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쿠마(熊) 또는 코마(駒, 高麗)는 고구려와 관련된 이름입니다.

그러면 기씨의 조상은 고구려라는 뜻이 됩니다.

게다가 이 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체(神体)는 히보코(日矛)라고 합니다.

히보코는 니혼쇼키(日本書紀)에도 나오는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틀림없습니다.

니혼쇼키는 아메노히보코를 신라에서 온 왕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메노히보코를 따라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고기를 잡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紀'는 '벼리' 즉 그물코를 거는 굵은 동아줄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따라서 기씨는 벼릿줄을 잘 다루는 어부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기씨는 신라왕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어느모로 보나 기씨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의 학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를 선뜻 인정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와카야마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정도로 애매하게, 한 발 더 나아가

"야마토(大和)조정이 한반도를 관할하면서 교류가 많았다" 라고 줄기차게 주장들을 합니다.

그 때 한반도 출정의 기지가 와카야마였으며, 그 선봉이 기(紀)씨집단이었고, 승전 후 귀환하며 많은 사람들을 데려 왔고,

그들이 귀화정착하면서 많은 한반도 관련 유적 유물이 남게 된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교류가 많았다는 정도로, 전쟁 포로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 지방에 한반도 관련 성씨와 지명, 신사와 신체(神体), 고분과 유물들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을까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기노가와(紀の川) 남안에는 이와세센즈카(岩橋千塚)고분군이라는 광범위한 지역 430여기의 고분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한반도 유물들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이 유적과 유물의 보존을 위하여 마쓰시타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기부로 건립된 박물관이 바로,

'와카야마켄리쓰기이후도키노오카(和歌山県立紀伊風土記の丘)'라고 명명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노가와 북안의 구스미(楠見)지역의 오타니(大谷)고분에서 3000여점의 토기 등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고대조선식 토기 3000점 발굴/와카야마의 구스미유적/대구출토품과 속 빼닮아(大邱出土品とそっくり)" 등의 제목으로 일본 신문들이 대서특필했습니다.

여기서의 대구출토품은 대구 인근의 약목고분토기를 지칭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수입품"이라던가, "와카야마가 조선출병의 기지라는 뒷받침"이라던가의 말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기(紀)씨는 분명 한반도 사람들이었으며,

기슈(紀州)는 우리나라 (대구?)사람들이 개척한 땅이며,

기노쿠니(紀國)는 우리 조상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일찌감치 마쓰리가 시작되는 와카야마성으로 우선 향합니다.

해자에 늘어진 벚나무 가지에 꽃이 피기 시작하고, 

건너편에 에도시대 초기의 성주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성을 확장할 때 쌓았다는 다카이시가키(高石垣)라고 불리는 담장이 보입니다.

막돌허튼층쌓기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성의 천수각의 기단성벽 면석에 수많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전국적으로는 1600년대 전반기에 축성된 성들에서 더러 나타납니다.

이 문양은 석재 주인의 표식, 석질의 표시, 부적의 일종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정설은 확립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천수각 앞에는 벚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 성은 158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기슈(紀州)를 평정하고 그의 동생 히데나가(秀長)에게 명하여 최초 축성하였고,

1619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요리노부(頼宣)가 성주로 입성하여 성을 확장 정비하여,

도쿠가와(徳川)가의 명성(名城)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1585년 토요토미의 기슈평정 당시에 와카야마의 철포부대 '사이카슈'가 강력 저항을 하였고,

결국 패퇴하여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때 이 부대의 리더가 스즈키마고이치(鈴木孫市)였고,

사람들은 그의 본래의 성보다 직업, 직책인 사이카를 성으로 대신 불러 사이카마고이치(雑賀孫市)라고 불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바로 스즈키마고이치로(鈴木孫一郎)였고, 성년이 된 후 행방이 사라진 것입니다.

추측컨데, 개명하여 조선원정군에 참여하였고 곧바로 귀화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귀화한 후에 철포제작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고,

직접 이를 들고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올린 사실은 그가 사이카슈 출신이라는 것에 신빙성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와카야마시 중앙부의 도라후스산(虎伏山) 정상에 자리잡은 이 성에서 시가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연립식 천수각(천수각이 양쪽에 있는 것)으로 된 이 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이카 마고이치로는 귀화하면서 일본 이름이 사야카라고만 하고, 일본에서의 행적을 일체 밝히지 않았으며,

조선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사성 김해 김충선으로 살다가 조선 땅에 뼈를 묻었습니다.

김충선(사야카) 장군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에서도 공히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와카야마는 앞에서 보았듯이 한반도 사람들이 개척한 땅이었고,

임진 정유 양 전쟁을 명분없는 전쟁으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전후의 국교회복을 위해 노력하여,

12회의 조선통신사의 왕래 등, 300년의 한일평화시대를 지속시킨 도쿠가와가의 영지였습니다.

또한 토요토미의 포로였던 유학자 '강항(姜沆)'의 도학을 후지와라 세이카, 하야시 라잔 등을 통해 받아들여 에도정권의 정치이념으로까지 수용하고,

교육기관의 시스템을 조선과 비슷하게 개편하게 됩니다.

이런 전차로 도쿠가와이에야스를 주신으로 하는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 경내에 사야카현창비(沙也可顯彰碑)를 세우고,

"사이카 마고이치는 와카야마의 보배(雜賀孫市は和歌山の宝)"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축제까지 벌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와카야마성 해자에 석양이 고요히 내려앉습니다.

날 저물어 어렵게 일부러 찾아간 지모토소바(地本蕎麦:본고장메밀국수)집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았습니다.

그냥 불켜진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습니다.

 

어둠이 깔린 와카야마성을 다시 올라봅니다.

불빛에 보는 밤벚꽃은 낮에 보던 것과는 또다른 환상적인 분위기입니다.

 

밤벚꽃을 보러 이 성의 꼭대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있습니다.

 

성 아래의 거리에는 사쿠라마쓰리(桜祭り) 등이 줄지어 걸려 있고, 하나미(花見: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북적입니다.

이런 곳에 먹거리 중심의 야시장이 서는 것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문옆에 휘늘어진 타레자쿠라(垂れ桜:능수벚꽃)이 불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와카야마성의 아침과 밤, 그 사이에 마고이치마쓰리(孫市祭り)가 분주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와카야마의 낮과 밤, 밝음과 어둠처럼,

사야카(김충선장군)에 대해서도 한일 양국에서 모두 대조적 평가가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삼란공신에다 정헌대부(정2품)에 까지 오르는 공신이었지만,

민족감정의 측면에선 "그래봐야 일본사람"이라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일본에서는 많은 국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사야카는 "매국노"라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도쿠가와 신봉자들과 양심있는 인사들은 임진 정유 양 왜란의 명분없음과 사야카의 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나마 미래지향적 한일우호관계에 긍정적 작용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쓰리의 여러 행사 중 '무사행렬'의 모습입니다.

행진하며 뭐라고 큰소리로 외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