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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넘어 바다건너

해천추범(海天秋帆)-1896민영환의 세계일주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8. 8. 23.


2018. 6. 16. 꽤 오랜만에 중앙도서관에 가서 민영환의 "해천추범"을 빌려 나왔습니다.

새 책은 교보문고에도 재고가 없고, 중고서적 가격(25,000원)도 새책(12,800원)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싸게 팔리고 있어서..

중앙도서관에 검색을 하니 대여용은 딱 1권 재고가 있길래 얼른 가서 빌린 것입니다.


폭염에 등나무정자에는 연신 포그 스프레이를 뿌려 댑니다.


분수도 쉴새 없이 물을 뿜어 보지만 힘이 들어 보입니다.


120여년 전,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 아관파천 등을 겪으면서,

격동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돌아 러시아를 보고 온 민영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아관파천' 이후의 대한제국의 명운을 건 외교전의 임무를 부여받은 민영환은

1896. 4/1 서울을 출발하여 4/2 에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향했습니다.

당시 러시아로 가는 통상적인 코스인 인천-상하이-홍콩-싱가폴-이집트-터키를 거쳐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려한 것이었으나,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가는 배를 놓치고 맙니다.

다음 배를 기다려 가면 대관식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워진 민영환 일행은 우회로를 찾아 나선 것이..

상하이-나가사키-도쿄-밴쿠버-리버풀-런던-베를린-바르샤바-모스크바-상트페테레부르크로 이어지는 지구의 2/3바퀴를 도는 루트였습니다. 

모스크바에는 5/20 도착하였고, 이 때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이동거리가 총 42,900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대관식 일정은 맞춰 참석했지만, 기타의 외교적 교섭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여 민영환은 크게 낙담하였으나,

러시아의 각종 선진화된 산업시설과 특히 군사시설을 관심있게 돌아보고, 이 제도들을 조선에 도입하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에 출발한 일정이 한여름을 넘어서고 있었고, 귀국을 하려고 하니 이번에는 이집트 쪽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시베리아루트로 귀국을 결심하게 됩니다.

8/19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로 출발하여-모스크바를 거쳐- 8/26 니주니노보고르트(*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 도시)에 도착하여'

여기서 바로 배로 갈아타고 이틀을 가서 8/28 사마라에 도착합니다.

사마라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노브니콜라예프스크(*러시아 제3의 도시) 등을 거치며 9/4 아친스크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마차를 타고 18일을 덜컹거리며 달려서 9/22 시들예전스카야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고

이제 화륜선(*장작불을 때서 가는 배)을 타고 실카강을 따라가서 9/26 블라고베솃스크(*국경무역도시로 조선사람들도 많이 거주했다고 하며, 1900년에 '의화단사건'이 일어난 곳)로 가서,

관용선으로 갈아타고 헤이룽강을 따라가 10/3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바로프스크는 1849년 하바로프라는 탐험가가 발견하여 개척된 땅이며, 현재 인구 60만 정도입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선 거류민들도 만나고, 10/4 에는 박물원도 관람했다 하는데, 아마도 현재의 '향토역사관'인 듯합니다.

10/8 다시 배를 타고 이만기차창까지 가서, 10/9 기차를 타고 10/10 우스리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원래 청나라 땅이었는데, 무라비요프라는 사람이 1860년대에 개척하여 항구를 개설하였다는데, 1896년 당시 인구는 2만6천 정도였는데, 그 중 청나라 사람이 1만명, 조선사람이 2천명, 일본사람이 5백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조선유민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수 백호, 주변의 여러 곳에는 1만여호나 되었다고 합니다)

10/16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남쪽을 향하니, 10/18 부산에 닿았고, 인천에 도착하니 10/20 이었다고 합니다.

10/21 돈의문으로 들어 황제를 알현하고 러시아황제의 친서를 바쳤습니다.



민영환은 1861년 전동에서 출생하였고,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 민겸호의 아들이며, 고종황제와는 내외종간이 되는 셈입니다.

조정에서 친인척의 대표주자로서 여러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많은 활약을 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폐기시키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뜻을 이루지 못하자,

11/30 명함에 유서를 써 놓고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하니,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태풍 솔릭과 시마론이 동시에 한반도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