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이치마쓰리(孫市祭り)는 옛날 와카야마에 있었던 댓포부타이(鐵包部隊), 사이카슈(雜賀衆)를 기리는 마쓰리입니다.
이 철포부대의 리더였다고 여겨지고 있는 사이카마고이치(雜賀孫市)의 적장자인 사이카마고이치로(雜賀孫一郞)가,
바로 사야카(김충선)이라는 설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마쓰리는 매년 3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열리며, 올해가 14번째의 마쓰리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유서깊은 전통마쓰리는 아직 아닌 셈이지요.
시바 료타로가 "한나라 기행(韓のくに紀行)" 에서 사야카의 실체를 일본에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고사카지로의 소설 "바다의 가야금(海の伽倻琴)" 등이 출간되고
NHK의 다큐멘타리 "조선출병 400년, 히데요시에게 반역한 일본 무장"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와카야마의 철포부대 사이카슈, 사야카의 친부로 알려진 마고이치의 존재도 부각되게 된 것입니다.
이후 사야카, 마고이치, 철포부대 등에 대해 연구회 등의 조직도 생겨나고,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에 사야카현창비(沙也可顯彰碑)도 세워지고, 이 신사를 중심으로 마고이치마쓰리도 생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가지 행사들이 열리지만 무사행렬과 철포사격시연이 볼만합니다.
무사행렬은 와카야마성(和歌山城) 내의 니노마루(二の丸)광장에서 출발하는데, 지금 준비가 분주합니다.
무사 복장을 한 참가자들이 출발을 위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당시에도 여성무사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재현 행렬 중에 여성 무사도 보이는군요.
행렬의 선도차에는 아예 마고이치죠(孫市城)라고 스티커를 붙였습니다.
라이온즈클럽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하니 이 마쓰리에 대한 지역 단체들의 호응이 좋은 듯합니다.
무사들이 행진하며 "에이 에이? 오~!"를 자주 외치는데,
"준비되었습니까?, 예 준비되었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본 전통복장(기모노)를 하고 구경나온 시민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서양사람도 같은 차림으로 구경하네요.
행렬의 종착지는 사기노모리 혼간지(鷺の森本願寺)이며,
이 사찰의 남쪽 거리는 하루종일 통행을 금지하여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각종 행사장과 매점들이 개설됩니다.
이 사기노모리는 마고이치의 철포부대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군대을 물리쳤다는 유서 깊은 장소라고 전해집니다.
행진을 마친 무사들이 거총하고 종료신고를 합니다.
어디를 보고 거총을 하는 것일까요?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를 주신으로 모신 기슈도쇼구(紀州東照宮) 경내에 사야카현창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현창비가 세워져 있는 곳은 본전 바로 앞의 이나리진쟈(稻荷神社) 영역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이나리진쟈의 주신은 이나리다이묘진(稻荷大明神)이라고 깃발이 펄럭거리고 있습니다.
도하대명신 이 역시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벼농사(稻作) 방법을 전해준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모든 이나리진쟈는 우리의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신사인 셈입니다.
도쿠가와케(德川家)의 영지 답게 엄청 높은 계단위에 본전이 있습니다.
계단도 오르기 전에 예외없이 사이센바코(복전함)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계단을 세어보니 110개였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계단 위에서 본전을 뒤로하고 바라보는 전망은 절경입니다.
차없는 거리로 다시 돌아오니, 모든 행사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인가 봅니다.
종일 마쓰리를 구경하고도 못내 아쉬운 것은 마쓰리현장 어디에도 아직 "사야카"는 없다는 것입니다.
기록과 고증의 한계, 한.일의 민족정서, 평가의 양면성 등에서 아직은 노골적으로 "사야카"를 드러낼 분위기는 아닌 게 확연합니다.
홍간지 안에서는 철포 사격 시범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철포는 히나와쥬(火繩銃)라고 하여 일명 조총(鳥銃)이라고도 불리며, 일본에 도입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였다고 합니다.
이 철포를 앞세워 일본을 통일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였고,
그의 가신 히데요시는 이 철포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감행하여 불과 한 달 만에 한양을 짓밟았으니, 그 최대 피해자는 조선이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방의 영주(다이묘)가 이 철포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를 가장 우려했다고 합니다.
다이묘들의 부인을 모두 에도(도쿄)에 인질로 불러들여 놓고,
다이묘들은 산킨코다이라는 기간에만 에도로 와서 부인과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에도 인근 하코네(箱根)에 검문소인 세키쇼(關所)를 세우고,
데온나(出女:에도를 탈출하는 여자 볼모)와 이리뎃포(入り鐵砲:에도로 들어오는 반란군)를 철저히 감시하였다고 하지요.
사격 시연 모습을 바라보니 여러 생각이 교차합니다.
한편으론 사야카(김충선장군)의 귀화와 이 철포 제조방법의 전래가 없었다면 어쨌을 것인가?
가정은 없다는 역사에 이런 저런 가설을 붙여보면서, 어렵게 쪼개낸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을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철포 소리를 한 번 들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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