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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도동서원

보릿고개를 넘으며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8. 6. 8.


도동서원 가는 길에 보리가 누렇게 익었습니다.

요즘에는 보리밭 구경하기가 무척 힘든지라 차를 세우고 잠시 어린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는 보리 수확 직전의 이맘때를 보릿고개라 불렀습니다.

보리는 아직 나오지 않고 쌀은 떨어져 견디기 힘든 때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럴 때 양식이 떨어진 집에서는 부잣집에서 쌀을 꾸어 먹는데, 이것을 "장리(長利?) 내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곡식을 장리곡이라 하였고, 봄에 내어먹은 장리곡은 가을에 쌀을 수확하면 50%의 이자를 붙여 갚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반년에 50%이니 1년으로 보면 100%가 되니 고리(高利)도 이만저만 고리가 아닌 것이지요.

이렇게 고리의 장리곡을 갚고 나면 그 다음해에는 더 일찍 양식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더 많은 장리곡을 얻어 먹어야 하는, 빈곤의 확대재생산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적은 토지를 가진 사람은 대지주에게 토지를 바치고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보리 이삭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보리 알갱이가 여섯 줄인 6조대맥이네요, 이것은 식용 보리입니다.

이 밖에 두 줄의 2조대맥이 있는데, 이것은 양조용 보리입니다. 즉 맥주와 위스키를 만드는 데 쓰는 보리가 2조대맥입니다.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이 보리가 익기도 전에 알이 밴 푸른 보리이삭을 따서 디딜방아에 찧어서 주먹밥처럼 뭉쳐서 먹었습니다.

이것을 '떡보리'라고 했는데, 아이들을 위해 사카린을 좀 넣어주면 환상적인 맛이었습니다.

이 사카린떡보리를 양 손에 들고 너무 좋아 방앗간을 뛰어나오다 넘어져 이가 부러지기도 했다는 그 시절이 불과 반 세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어서 끼니의 태반은 '보리쌀 곱삶아 먹기'였습니다.

디딜방아로 찧은 보리는 단단하여 초벌삶기를 하여 광주리에 담아 높은 곳에 걸어 뒀다가,

끼니 때마다 적당량을 덜어내어 다시 솥에 넣고 물을 부어 밥을 지으면 소위 꽁보리밥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쌀이 전혀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을 보리쌀 곱삶아 먹는다고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보리양식도 충분하지를 못하다보니 여기다 콩나물이나 감자 또는 무를 썰어 넣어서 보리밥을 해 먹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양식 늘려먹기'라고 하였습니다.

콩나물이나 감자보리밥은 그래도 먹을 만했는데, 무보리밥은 정말이지 그 특이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와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학교에 가서 점심 때 도시락을 풀어보면,

역시 그 무보리밥에 새까만 무지(무를 된장독에 오래 박아두었다가 꺼내먹는 무장아찌) 몇 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해서 혼자 돌아앉아 도시락을 먹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혼밥을 잘 먹는 것은 그 때 생긴 버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릿고개를 넘듯 다람재를 넘어 도동서원에 이릅니다.


도동서원 담장 밖에는 대추꽃이 피었습니다.

대추는 씨가 하나 밖에 없어 실과의 왕이라 하여 제삿상의 맨 앞자리에 놓입니다.


그 옆에 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꽃은 밤꽃이군요.

밤은 세쪽이니 삼정승과 같다 하여 두번째 자리에 놓이게 되지요.

이렇게 6판서의 배, 8도감사의 감까지를 일컬어 조율이시(棗栗梨枾)라 하여 그 순서가 엄격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잡과라 하여 특별한 순서가 없었던 것이랍니다.


몇 달간 서원 밖에서 공사를 하더니 화재진압용으로 보이는 스프링쿨러 3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문화재보호에 만전이 기해지기를 바래 봅니다.


문화재지킴이들이 와서 안내판 수정도 하고, 벤치 손질을 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 중정당 마루에 들기름칠을 했다는데 아직 완전 건조가 되지 않은 듯합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 잘 건조가 되어야 할 텐데...


몇 해 전에 낡은 문짝을 떼어내고 새 문짝을 만들어 단 중정당의 좌측 덧문입니다.

널판지가 바깥쪽으로 심하게 휘어져 곧 망가질 것 같습니다.

건조가 덜 된 나무를 사용한 듯하며, 게다가 널판지의 심재면을 바깥쪽으로 대어야 하는 것이 목공의 기본상식인데,

자세히 살펴보니 변재면을 바깥쪽으로 대고 문짝을 제작하였네요.

문화재보수허가업체에서 작업을 했을 텐데도 이렇게 된 것은 웬일일까요?


우측 덧문의 위쪽 개탕도 새로 했다는 것이 이렇게 휘어지고 쪼개지고...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몇 십 배 오래된 옛날 문짝은 이렇게 뒤틀림이 없이 곱게 세월의 켜를 간직하고 있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