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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넘어 바다건너

신라명신(장보고?)과 오쓰(大津)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3. 1. 23.

2003년 2월 26일 (수요일)


오쓰(大津)는 교토의 북쪽에 있는 도시로 비와코(琵琶湖)의 남쪽에 면해 있어서 옛날 수로와 육로를 연결하던 항구였다.
지명도 '큰배가 닿는 곳'이라는 뜻이다.
쓰루가(敦賀)로 반입된 한반도의 문물이 비와코의 수로를 통해 이 곳 오쓰까지 와서 상륙하여 교토 등지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던 것이다.
교토역에서 니시오쓰(西大津)역까지는 230엔이다.
역에 내려서 버스를 타려고 보니, 버스 올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셋이니 기본요금 정도로 갈 수 있으면 택시를 타도 그게 그거라는 생각이 들어 택시를 탔다.
택시요금은 680엔이 나왔다.


三井寺

미이테라(三井寺)는 온죠지(圓城寺)라고도 불리며,

입당구법승으로 유명한 지쇼(智證)대사를 개조로 9세기에 창건된 천태사문종(天台寺門宗)의 총본산이다.
영천(靈泉)이라는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어서,

덴지(天智), 덴무(天武), 지토(持統) 등 세 천황의 산탕(産湯:갓난아기의 목욕물)으로 사용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미륵불이 비불(秘佛)로 봉안되어 있는 금당은 게이쵸(慶長)4년(1599년)에 재건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모모야마(桃山)시대의 명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미이寺의 금당 - 오츠市)

문외한의 눈으로도 지금까지 보아 온 일본 절의 금당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히와다(檜皮:편백나무껍질)지붕과 사각기둥의 고풍스런 빛깔의 무거움에 반하여,

추녀의 곡선이 주는 느낌은 날아갈 듯 가벼워서 묘하게 대비가 된다.
그러면서 건물 전체의 비례는 매우 안정감이 든다.

이 절에는 지증대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경전류를 보관하고 있다는 唐院이 중요문화재로 되어 있고,
역시 중요문화재인 일체경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판 일체경을 넣은 회전식의 팔각윤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모습은 예천 용문사의 윤장대와 비슷한데 크기는 훨씬 크다. 
 

(미이寺의 일체경장 - 오츠市)

그런데 고려판 일체경이 어디서 어떻게 입수되어 여기까지 와 있는지는 알 수 없어 안타깝다.
아마도 이 전각이 지어진 것이 게이쵸(慶長) 7년(1602년)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임진·정유양란 때에 가져온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또 이 절에는 세 구의 의미 있는 종(鐘)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금당 앞의 종루에 걸려있는 종으로 이 곳 사람들로부터 '三井의 晩鐘'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을 받아왔다는 종이다.
모양으로 보아, 도다이지 범종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일본종이다.

(미이寺 미이의 만종 - 오츠市)

안내판에는 이 종은 일본 3명종의 하나로 불려지며, 1996년에 환경청에 의해 「일본의 音風景 100선」에도 선정된 바 있고,

이 종은 1602년에 주조되었으며 무게는 22.5톤이고,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유두(연뢰)가 새겨져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종은 '벤케이가 끌고 다닌 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오래된 종인데, 이 종의 유래가 간단치 않다.

(미이寺 벤케이의 종 -오츠市)

나라시대에 만들어진 이 범종은,

옛날 다와라토타히데사토(俵藤太秀鄕)란 사람이 미카미야마(三上山)의 무카데(百足:지네)를 물리친 사례로,

용궁에서 가지고 온 것을 미이테라에 기증하였다고 전해 온다.
그 후 산문(山門:延曆寺)과의 싸움에서

벤케이(弁慶 : 1192년, 가마쿠라바쿠후를 창설한 미나모토노요리모토의 동생인 요시쓰네의 부하로 힘이 몹시 센 장사였다고 함)가 탈취하여,

히에잔(比叡山)으로 끌고 올라가서 쳐보니,
'이노-이노-'(간사이벤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울어서,

벤케이는 그렇게도 미이테라에 돌아가고 싶으냐고 하며, 종을 골짜기 아래로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실제 종의 표면에 긁히고 패인 자국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그 때 끌고 다닐 때 생긴 자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승은 그렇다 치고, 이 종의 주조년도가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고,

또 그 모습이 큐슈 다자이후의 간세온지의 종과 매우 비슷하여,

간세온지 종과 함께 백제의 유민들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백제가 660년에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많이 건너왔으며, 그 중에는 종을 주조하는 기술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종을 만들었다?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리 생각하고 종을 보면 전형적인 일본종과 다른 곳이 있다.
일본종은 천판과 종신의 구별이 없이 일체형인데 반해, 이들 두 종은 신라종처럼 천판과 종신을 구별하는 각(角)이 확실하게 지워져 있다.
그리고 일본종은 상·하대가 없는데, 이 두 개의 종에는 하대는 분명치 않으나 상대는 신라종처럼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종이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은 백제종의 원형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사진으로 본 조계사 범종과 많이 닮았다는 데에 생 각이 미쳤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라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가, 위작이라는 설이 제기되면서 국보에서 해제된 조계사 범종,
어쩌면 일본에 있는 이 두 개의 종과 함께 또 하나의 백제종의 원형은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범종의 양식이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편,

신라로 들어가면서 좀 더 독특한 양식으로 분화해 갔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아니면 중국에서 이미 분화된 양식이 한 쪽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지는 한편,

다른 한 쪽은 육로를 거쳐 고구려를 통해 신라로 전해지는 두 개의 루트를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간세온지 종도, 조계사의 범종도 확실히 한 번 보러 가리라.

또 하나의 종, 고려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 경내를 다 돌면서 아무리 찾아도 안내서에도 없고, 표지판도 없었다.
정문 안내소에 다시 가서 물었더니 관음당 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관음당으로 다시 갔다.
관음당은 비와코를 내려다보며, 이 절의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당우다.
올라가는 계단이 장난이 아니다.
관음당에서는 불공이 한창이었다.
불공이 언제 끝날지도 몰라, 불공드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기념품 파는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아까 지나쳐왔던 작은 종루를 가리키며 그 속에 종이 있다고 했다.
그 종각의 안내판에는 무슨 일본종이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는데...

관음당 바로 옆의 작은 종루로 다시 갔다.
안내판을 다시 보아도 무슨 일본종 그림과 함께 그 종의 유래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선 종루 안으로 들어갔다. 
 

(미이寺 고려종 - 오츠市)

"아! 이거 한국종 맞아요!"
오랜만에 현정이 반색을 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맞다. 맞아!"
여기서 맞다는 것은 한국종이 맞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렇게 온 우리의 여행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열 일곱 살의 고등학생인 이 아이를 이 곳까지 데려오면서, 우리 것이 어떤 모습이고,

다른 나라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 주고, 보여 주고자 하였던 것이 틀린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세 식구의 4박5일 여행에 300만원이 들었다.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순간을 나는 맛보며 작은 희열을 느꼈다.

종각 안의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종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아래쪽이 약간 넓어진 것으로 보아 우선 고려시대의 종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래에서 들여다보이는 종 내부에 음통의 구멍이 보였다. 
 

(미이寺 고려종 내부 - 오츠市)

음통(음관이라고도 한다)은 중국종이나 일본종에는 없는 한국종 고유의 것이다.
조그만 구멍으로 온 하늘이 다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구멍을 통과한 빛이 몸을 감싸는 듯한 포근함이 느껴졌다.
종신에는 하대와 상대가 뚜렷하고, 연화당좌와 비천상도 새겨져 있다.
4개의 연곽(일본에서는 유곽이라 함) 속에 9개씩의 연뢰(일본에서는 유두라고 부름)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고,

용뉴에는 단용에 음관이 있는 전형적인 한국종의 모습이 틀림없다.
여기서 한국종이라고 하면 신라종과 이를 계승한 고려종까지를 말한다.

중국종은 종신의 끝이 많이 벌어지는 튤립 모양인 것이 특징이며, 용뉴가 쌍용이고 음통이 없다.
종신에는 상·하대가 없고, 연곽과 연뢰가 전혀 없으며, 비천상도 보이지 않고, 종횡의 줄무늬 정도의 단순한 문양이 주류를 이룬다.

일본종은 종신의 중간부분부터 끝부분까지가 거의 같거나 약간 벌어지는 컵형인 것이 대부분이다.
용뉴가 쌍용이고 음통이 없는 것은 중국종과 같다.
상·하대도 없고, 연곽과 연뢰는 있으되 모양과 숫자가 일정치 않으며 대체로 연뢰의 수가 많다.
비천상은 없고, 종횡의 줄무늬가 당좌 부근에서 X자로 교차하는 모양을 하는 것이 특징적인 문양이다.

이 종각에는 지키는 이도 없어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높이 달려 있어 윗부분을 자세히 찍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종을 쳐 보았다.
일본에서는 종치는 방법을 개량하여, 동양종치는 방법에다 서양종 치는 방법을 혼합해 놓았다.
한국에서는 종을 지면 가까이 달고, 사람이 당목을 직접 당겨서 치는 방법을 쓰는데,

일본에서는 대체로 종을 종루의 천장에 높이 달고, 당목을 설치하지만, 당목에다 밧줄을 달아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고,

사람은 아래에서 밧줄을 아래로 또는 옆으로 잡아당겨 치도록 해 놓았다.
편리하긴 하나 종을 치는 느낌은 훨씬 못한 것 아닌가 싶다.
당목을 좌악 당겨서 쿵 쳐야지 맛이 날텐데...
줄을 당겨 다시 한 번 종을 쳐보았다.
큰 종이 아니라 맥놀이와 장중한 느낌은 적으나, 매우 맑은 소리가 났다.
더 쳐보고 싶었으나 바로 옆 관음당에서의 법회가 마음에 걸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종루앞의 안내판에는 엉뚱한 종의 그림과 설명이 붙어 있고,

안내책자에는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이상하여 그 내용을 다시 꼼꼼히 보았다. 

안내판의 설명을 자세히 들여다 본 즉, 아뿔싸!

"동자인연(童子因緣)의 종"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에밀레종의 전설'과 흡사한 이야기가 담긴 종이 걸려 있던 종루인데,

이 종이 제2차세계대전 때 공출되고 이 한장의 사진만 남아 있으며,

지금 종루에 걸려 있는 것은 이 절 소장의 중요문화재 '조선종'을 모주(模鑄:본 떠 주조함)한 종이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본 것은 모형이고 원형은 따로 감춰두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원형임을 숨기려고 일부러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써 놓은 것일까?

기쁨도 잠시 또 하나의 의문을 품은 채 씁쓰레하게 발길을 돌렸다.

 

新羅社, 新羅善神堂, 新羅明神

미이테라의 정문 안내소에서 따로 받은 지도를 보면서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라사를 찾아 나섰다.
지도를 따라 가는 도중 도로변에서 일본에선 보기 드문 석탑 하나를 발견하였다.
언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탑신석이나 감실이 없이 옥개석만 쌓아 놓은 탑이었다.
호류지에서 나오다가 담장 너머 윗부분만 보였던 탑도 이와 비슷했었다.
일본의 석탑은 다 이런가?

석탑은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정작 놀라운 것은 탑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역시 도로변에 심상찮게 마음이 끌리는 유구가 하나 있었다.

온돌유적이었다.

(일본의 온돌 유구 - 오츠市)

일본에 온돌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온돌의 유적을 보다니...
그리고 이것이 왜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는지 나도 모르겠다.
이런 경우 자꾸만 무슨 민족감정 같은 것이 앞서다 보면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흐려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노력으론 잘 안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온돌유구 안내판 - 오츠市)

"이 遺構는 JR 湖西線 가라사키(唐崎)역 서쪽, 히에(比叡)산록에 펼쳐지는 穴太유적에서 발견된 특수 가마도(溫突遺構)이다.
고대의 것으로는, 현재 우리 나라(日本)에서 유일한 것이며, 함께 출토된 유물에서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국도 161호선 니시오츠(西大津) 우회도로에 관련된 조사에서 발견되었고, 약 4m가 남아 있었다.
이 가마도는, 燒成室(가마도본체)·煙道부터 만들어져 있었다.
그 안의 소성실에는 점토를 바르고, 취사용의 기물을 받치는 돌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연도는 돌판으로 아궁이를 향해 왼쪽에 붙어 있고, 완만하게 경사지며 뻗어서, 약 2m에서 오른쪽으로 굽으며, 다시 뻗어 있었다.
돌판에는 그을음이 붙어 있어, 불이 들어왔음을 잘 알 수 있다.
이 유구는 후세에 발견되어, 그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돌로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건물이 지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穴太 지역은 예로부터 渡來人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으며, 이 유구는 현재 조선반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닥난방인 온돌이라고 생각된다."

7세기 전반의 한반도는 삼국시대 말기로 분쟁으로 혼란하였던 때이다.
자연히 혼란을 피해 유민들이 열도로 많이 건너왔을 것이고, 이 온돌 유적은 그들이 만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유적은 더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온돌유적을 들여다보다가,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앞쪽 언덕 위에 오츠시 민속박물관이 있었다.
탑과 온돌유적을 박물관 앞에다 갖다 놓는다고 옮겨놓은 것 같은데, 너무 길가에 방치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박물관에 가보면 온돌 관련 유물을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新羅社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에서 준 약도와는 달리 무슨 연병장 같은 것이 나타나고, 경 찰관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조교인 듯한 경찰관을 붙들고 '新羅社'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 아, '실라샤데스요네' 하면서 잘 아는 체했다.
'시라기'나 '시로키' 따위로 발음하지 않고 정확히 '실라'로 발음하는 것은 듣기가 좋았다.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니 펜스 중간에 조그만 문이 나 있었다.
젊은 경찰관은 문을 열어주면서, 저 쪽에 가면 안내판이 보일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신라선신당 푯말 - 오츠市)

어두컴컴하게 고목이 우거진 숲 속 길에 나무로 된 고색창연한 표지판이지만,

글씨는 또렷하게 '新羅善神堂', '新羅三郞の墓' 등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저번에 TV에서 '해신 장보고'라는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신라선신당'과 '신라사부로의 묘' 그리고 '신라명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신사인 듯한 건물이 있고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출입문은 잠겨져 있었다.
출입문 옆에 가정집 같은 것이 보이고 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작은 문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약간 큰 소리로 "고멘쿠다사이" 했더니,
관리인인 듯한 중년 여성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다짜고짜 新羅明神象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신라명신상은 秘佛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년인가 한국의 KBS방송국에서 최 뭐라고 하는 작가와 함께 취재를 온 적이 있다고 했다(그 작가는 최인호다).
그 때도 보여주지 못했는데(KBS에서는 촬영을 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더욱 어렵지 않느냐고 설득조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무슨 책을 꺼내어 사진만 보고 가라는 것이었다.
사진이야 익히 본 것이고 직접 알현하고 싶다고 하니, 그래도 비불을 보는 것은 안되고 사당 밖에서만 보라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신라선신당 - 오츠市)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라명신은 三井寺의 개조인 지증대사(엔칭스님)가 당나라에서 구법하고 돌아오던 길에 반도 부근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갑자기 신라명신이 나타나서 뱃길을 인도해 주어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온 지증대사는 그 고마운 신라명신의 좌상을 만들어 수호신으로 모셨고, 그것이 비불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그 명신은 神이 아니라, 당시 청해진을 설치하고 동북아지역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던 장보고의 상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그러면 신라사부로의 묘가 있다고 했는데, 그는 또 누구일까?
노부나가와의 대립 끝에 멸망한 다케다 신겐 가문의 시조가 된 사람이 신라명신의 위용에 감복되어 자신의 성을 신라 로 고쳤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신라사부로 미나모토 요시미츠라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일본 사람들은 태어난 곳을 이름으로 부르는 수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신라·사부로는 신라·서라벌에서 태어난(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좀 전 보았던 온돌을 만들고 살았던 한반도의 유민들 그 집단의 수장쯤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다케다 신겐의 선조도 한반도 사람이 된다.
이런, 가게무샤가 들을라!
그 신라사부로의 묘가 이 신사의 뒷산 너머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가 보기가 힘들어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히에잔(比叡山)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여자 관리인이 신사 정문 앞 도로까지 따라 나오면서,

어디로 어떻게 가면 전차역이 나오는데, 전차를 타고 종점까지 가서 등산케이블카를 타 라고 자세히 알려 주었다.
신라명신상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조금은 미안한 모양이었다.

원래 계획은 오늘 오후에 일본의 城 중에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히메지(姬路)城을 가는 것이었으나,

시간과 비용관계상 여기서 가까운 히에잔으로 목적지를 변경하였다.
히에山은 교토의 북쪽에 있는 험준한 산으로 스기(杉)나무가 많이 자란다.

(北山스기 - 히에山)

히에山을 포함한 교토 북산의 스기나무(가지를 자꾸 잘라 하늘 높이 자라게 한다)를 가리켜 기타야마스기(北山杉)라고 부르며,

여기 사람들이 자랑스런 일본 목조건축의 재료로 여기는 것이다.
비와호가 피로 물든 역사를 품고 있다면, 히에산은 수천의 송장 타는 연기로 하늘을 찌른 역사를 묻고 있는 산이다.
비와호 피비린내의 역사도 그러하지만, 히에산 노린내의 역사도 그 주역은 역시 오다 노부나가다.
그는 히에산의 승려들이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자, 불교와 승려는 타락하였고 그의 개혁에 장애가 된다는 명분으로 히에산을 포위하고,

僧俗 3천여 명과 5백여 건의 당탑 및 문서를 불태우는, 희대의 만행을 자행하게 된다.
진시황의 악행이 분서갱유라면 오다의 만행은 분법갱승이 되는 것일까?
참살의 조역은 역시 후일 혼노寺의 반역을 일으키는 아케치 미츠히데였다.

유난히 美意識이 강했던 노부나가는 늘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죽고 싶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노부나가의 이상이며, 그 시대 의식 있는 무사의 소망이었다.
희에산의 참살을 두고 노부나가는 고민했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어찌 세상을 깨끗이 하겠는가? 이것은 내게 내려진 천명이다." 라고.
'天命', 참으로 무서운 것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편리한 것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 周나라의 무왕도 商나라를 뒤엎고 나서, "나는 천명 을 받았다." 는 것이었다.
唐태종도 그랬다. 태자인 형과 아우를 죽이고, 부왕(이연)에게서 양위받은 이세민(태종)은 '천명'을 거론하며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子思(공자의 손자)는 '天命之謂性' 이라, 즉 '天命'은 바로 '인간의 품성 즉 도리' 라 하였는데,

살육도 찬탈도 '인간의 도리'가 되는 아전인수는 때와 곳이 다름없는 것인가?

사카모토(阪本)역에 내려서 20여분을 어렵사리 찾아서 사카모토케이블역에 도착하여 보니,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케이블카 왕복요금만 두당 1,570엔씩이었다.
곱하기 삼에다 또 십점 얼마를 곱하니 자그마치 5만원 돈이 되지 않는가?
그냥 돌아가면 체면상 말이 아닌지라, 속에 꼬~장을 담으면서도 표정은 태연하게, 티켓 자동판매기에 돈을 넣었다.
그놈의 기계는 일제라서 그런지 고장도 안 나고, 만엔 지폐를 잘도 삼켰다.
거금을 삼키고 기계가 내뱉은 것은 '福·緣' 이라고 못생긴 글자가 찍힌 티켓 석 장이었다.
그리고 오쯔리(잔돈)였다.

일본의 케이블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케이블카와는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가다가 가끔 멈춰서 신문에 크게 나고 하는 그런 것을 일본에서는 '로프웨 이'라고 부르고,
'케이블카'는 지상에 레일을 깔아 그 위에 바퀴 달린 차를 얹고, 그 차를 로프로 끌어올리고 내리고 하는 것을 일컫는다.

(阪本케이블카 - 히에山)

이곳의 사카모토케이블이 일본에서 가장 긴 케이블카라고 한다.

사카모토에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차밭(茶園)이 있다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케이블카역 출입문 앞에 보기 드문 유물이 하나 전시되어 있었다.

(차석 유물 - 오츠市)

그것은 車石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옛날 우마차의 레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과 함께 설명이 붙어 있었다.

(차석 안내판 - 오츠市)

에도시대에 오츠와 교토간의 도로에 깔았던 우차의 레일의 일종이며, 1804년부터 2년간에 걸쳐서 오츠와 교토간 12Km 구간에 시공되었고,

에도시대 획기적인 도로행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라고 소개하고 있다.
200년 전에 도시와 도시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포장하고 우차 레일을 깔았다는 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는 꽤 긴 터널도 있고, 경사가 엄청 심하여 아찔한 곳도 많지만,

시원한 비와호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탄성이 흘러나온다. 
 

(엔랴쿠寺역 - 히에山)

이런 아름다운 곳에 그런 어두운 역사가 있었다니, 참으로 역사는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 또 있을지?

케이블카 엔략쿠지(延曆寺)역에 내려서 십여 분 걸으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엔랴쿠寺가 나타난다.
이 절이 노부나가에 의해 유린당했던 히에잔의 중심사찰이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히에山을 재건할 때, 많은 부분이 재건되었을 것이다.
만행의 와중에서도 佛法과 學僧의 소멸을 안타까워했던

미츠히데(미츠히데는 미오의 浪人 출신으로 학문적 소양과 교양이 풍부한 전략가였다)가 어떤 것을 남겨 두었는지 궁금하였지만,

시간도 그렇고 5,000엔씩의 입장료도 너무 비싸고 하여, 엔랴쿠지는 정문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관람을 마쳤다.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하행선 케이블카를 다시 타고 내려와서, 전철역 앞에서 식사를 했다.
현정 엄마가 따뜻한 국물이 먹고싶다고 하여, 우동과 소바(메밀국수)를 따뜻한 국물에 말아 달라 하여 먹었다.
할머니가 국수를 말아 주었는데, 맛이 우리 나라 할매국수보다는 턱도 없었다.
私鐵 전차로 얼마쯤 가다가 JR로 갈아타고 교토역에 내려서, 현정이 고대하던 신칸센을 한 번 타 보기로 하였다.
신칸센 교토역에서 신오사카역까지는 16분밖에 걸리지 않는데, 차비는 1,380엔이다.
신오사카역에 내려 또 갈아타고 숙소가 있는 오사카역까지 가 는 수고를 알지만,

그래도 신칸센을 한 번 타보고 싶어하는 열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원래는 한·일 선박과 JR패스를 끊어서 신칸센을 배터지게 타면서 느긋하게 구경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사정이 바뀌다 보니 신칸센은 단 16분만 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도 자유석의 담배연기를 참아가면서.


2003년 2월 27일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오사카역에서 간사이공항행 열차를 탔는데, 도중에 차내방송이 이상하여 자세히 들어보니,

우리가 탄 칸은 중간에서 분리하여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억지로 잡은 자리에 미련을 남기고 뒤칸으로 옮겨 탔다.
JR 간사이공항역에서 마지막으로 일본땅에 소금기를 보태주고 비행기를 탔다.
아, 비행기를 타기 전에 고등학생을 위해 면도기 하나를 샀다.
잔돈을 다 털어 주고 나머지를 카드로 정산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산 물건은 이 면도기와 군에 간 녀석이 지 동생에게 부탁한 CD 두 장,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과자 두 봉지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세 식구의 눈과 귀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서 각자의 인생을 풍부히 하는데 일조가 되기를 기대한다.


追記

제가 여행을 하고 나서, 참으로 수준이 형편없으면서도 자꾸 글을 써서 남에게 보여 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공부를 좀 하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잡설같은 글을 아무따나라도 읽어주시면 고맙고, 또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것,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지적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