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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넘어 바다건너

일본으로 간 가야의 불의 혼, 가라쓰(唐津)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13. 5. 7.

가라츠야끼 - 2004. 1. 26.

여섯시 모닝콜에 맞춰 일어나, 어제 저녁 나카스(中州)에서 사 온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한 개 남은 컵라면에 물을 부어 놓고 보니 젓가락이 없었다.

욕실에 비치된 일회용 칫솔 두 개를 젓가락 삼아서 라면을 건져 먹으려니 미끄러워 잘 되지 않았다.

컵에다 입을 대고 칫솔젓가락으로 면발을 걸어 넣다가 입술을 데일 뻔했다.

집 나서면 희한한 짓을 해도 그리 우습지가 않다. 웃는 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역으로 갔다.

하카타(博多)역에서 가라쓰(唐津)로 가는 기차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역무원이 지하철을 타고 가라고 했다.

지하철은 ‘큐슈JR패스’가 통용되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후쿠오카시내 지하철(空港線)을 타고 지쿠젠마에바라(筑前前原)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JR로 갈아타고 가야 되는 것이었다.

출근시간이지만 기차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차창의 오른쪽으로 아침바다가 펼쳐진다. 이 바다가 ‘현해탄’이고,

이 곳의 마을 이름이 겐카이마치(玄海町)이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는 아침 바다의 모습은 상쾌하지만,

이 바다에 얽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 맺힌 사연들을 생각하면 목이 멘다.

 



후쿠오카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가라쓰(唐津)시는

부산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항구 도시다.

이 가라츠의 바로 서쪽에 요부코(呼子)반도가 있는데,

그 반도 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을 세워 임진왜란의 전진기지로 삼은 나고야성터가 있다.

여기서 선단을 발진하여 잇키(壹岐)섬과 쓰시마(對馬)섬을 징검다리 삼아

부산포로 침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물론 조선의 도자기와 도공들을 데리고 퇴각할 때에도 이 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 때의 그 도자기들 가운데 막사발형의 일부가 ‘이도챠완’으로 불리면서 사무라이들의 애장품이 되었고,

오늘날 국보로까지 지정되게 된 것이다.

이도(井戶)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학술적으로 규명된 정설은 없다.

도자기를 가져가서 보관한 사람의 姓이 이도였다고 하기도 하고,

가지고 온 곳 또는 만든 곳이 이도(井戶)였다고 하기도 하는데,

만든 곳의 지명이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하동에 있는 '샘문골' 도요지를 비롯해서 지리산 자락에 옛 도요지가 많이 발견되었고,

도요지 가까이 우물(샘)이 있고, 지명이 샘골, 새미골 등으로 불리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샘(우물)은 일본말로 이도(井戶)라고 하고,

그릇을 차사발로 먼저 사용했으니 이름이 '이도챠완(井戶茶碗)'으로 명명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러한 이도챠완의 본래의 용도가 조선 서민들의 질그릇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막사발'이라 부르는 그것이라는 설이 일본에서 먼저 제기되어(야나가 무네요시),

우리 나라에서까지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즈음의 우리 나라의 사정으로 볼 때 서민용 도자기 가마가 있을 수 없었고,

가마는 대부분 관용이었으며 간혹 사찰에 부속된 가마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막사발이 서민용 그릇이었을 수가 없고,

절간 스님들의 '발우'가 아니었을까 보는 설이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소설가 정동주씨).

이런 맥락에서 '막사발'이란 이름 또한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도공들은 각자 자기를 잡아가는 주인(주로 각지의 번주)들을 따라 가서 번주의 어용도공(御用陶工)이 되어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서일본지역에서 한국도자기(죠센야끼)의 맥을 이어 오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

야마구치현 하기시(하기야끼),

가고시마현의 히가시이치키시(사쓰마야끼),

사가현의 아리타시(아리타야끼)와 이곳 가라쓰시(가라쓰야끼) 등을 들 수 있다.

하기야끼는 진주부근의 관요(官窯)의 사기장이었던 이작광이라는 사람이

동생인 이경과 함께 하기번의 번주에게 끌려와 어용가마를 만든 것이 유래가 되었고,

현재 야마구치현(山口縣) 하기시 근교에서 사카 고라이자에몬(坂 高麗左衛門)이란 이름으로 12대가 맥을 이어 오고 있으며,

한국풍의 챠완(茶碗:찻사발)을 많이 굽고 있다.

일본의 챠완에 있어서

첫 번째가 라쿠(樂)챠완,

두 번째가 하기챠완,

세 번째가 가라쓰(唐津)챠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명성이 높다.

사쓰마야끼는 심당길(심수관가의 원조), 박평의를 중심으로 한 17성씨의 후예들이 명치유신 이전까지,

한국사람끼리 한마을에 살면서,

한국옷을 입고,

한국말을 쓰며,

한국을 향하여 제사지내며,

혼인도 한국사람들끼리만 하면서,

도자기를 만들어 온,

큐슈 최남단 가고시마현(鹿兒島縣) 히가시이치키시(東市來市)의 도자촌이다.

심당길의 후예인 14대 심수관이 한국이름을 그대로 습명하고 ‘심수관도예’를 지켜 오고 있으면서,

한일 양국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

 


아리타야끼는 가마의 수(150여 개소)나 생산량 면에서 일본 최대를 자랑하는 사가현(佐賀県)의 도자촌인데,

이 곳 역시 왜란 중 붙잡혀 온 충남 공주 출신의 도공 이삼평이

사가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어용(御用) 가마를 설치하여 도자기를 구운 것이 시초가 되었다.

아리타야끼의 창시는 일본의 도자기 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1916년에 아리타야끼 창시 300주년을 기념하여 아리타시에 이삼평의 비가 세워졌으며,

이듬해부터 매년 도조제(陶祖祭)가 개최되고 있다.

현재는 백자계의 채색도기가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가라쓰야끼는 사가현 북쪽 현해탄을 면하고 있는 가라쓰시에서 나는 도자기를 일컫는다.

‘가라쓰(唐津)’라는 지명만으로 ‘가라쓰 도자기’를 대신할 정도로 가라쓰는 도자기로 대표되는 고장이다.

이 가라쓰야끼 역시 왜란 때 이 곳으로 잡혀 온

경남 사천 출신의 도공 김전계라는 사람이 가라쓰에 가마를 연 것이 시초가 되었다.

가라쓰차완에 한국 도자기의 냄새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곳에 김전계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영지를 옮긴 주인을 따라 옮겨 다니면서 가마를 운영하는 바람에,

그의 후예는 후쿠오카현 아가노와 구마모토현 하라야마에 나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가라쓰(唐津)는 그 지명 자체가 옛 ‘가야’와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라’는 ‘唐’으로도 쓰지만, ‘韓’字도 역시 ‘가라’로 읽는다.

옛 삼한 중 ‘변한’지역이 ‘가야’가 되었고, 가야는 ‘가라’, ‘가락’ 등으로도 불리었던 것을 상고하면

‘가라쓰’의 ‘가라’는 ‘가야’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고, '쓰(津)'는 '배가 닿는 곳'이므로

'가라쓰'는 '가야의 배가 와 닿는 곳'이 되는 것이다.

또한 가라쓰의 토착세력 중에 ‘하다’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

후꾸이현 ‘시라기(신라)’ 마을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 온 사람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가라쓰는 김전계가 가마를 열기 전 아득한 옛날부터 질그릇을 만들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을 잘 다루면서 제철기술과 토기를 발달시켰던 가야 사람들이 바다로 나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고,

편서풍과 해류에 밀려 처음 닿은 곳은 쓰시마(대마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곳은 농사를 지을 땅도 충분치 못하였고, 질그릇을 구울 흙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

가야 사람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잇키섬을 거쳐서 이 곳 규슈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을 것이다.

와서 보니 가야보다 더 따뜻하고 땅도 넓어 이 곳에 눌러 살기로 하고 ‘가라쓰’라고 땅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후일 그들의 성은 ‘바다’를 뜻하는 ‘하타’씨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릇을 구울 흙은 마땅치가 않아 가야토기만큼 우수한 그릇은 구워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 왜란 때 잡혀 와서 이 곳 가라쓰에 가마를 연 도공 김전계 또한

가야의 혼을 받은 사천 출신이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라쓰시에는 수많은 가마가 산재해 있으나,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나카사토타로우에몬(中里太郞右衛門)陶房’이다.

JR 가라쓰역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에도시대의 가마터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전시관에서는 고가의 작품과 생활도자기들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고 있다.

 

 
예술품으로 보이는 작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생활자기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조그만 찻잔이나 물컵 하나도 웬만하면 수만 원 하니 쉽게 살 수가 없다.

1만엔 붙은 가라쓰챠완 한개와 소품 몇 개만 사고 전시관을 나섰다.

남의 나라 도공들을 잡아가서 배운 기술을 가지고 이렇게 비싼 물건을 만들어 팔다니,

또 다시 분한 생각인지 억울한 마음인지 속이 편치 않아 온다.

도자기전시관의 정원이 너무 깍쟁이처럼 꾸며져 있고,

대문 양 쪽에 서 있는 망주석이 그나마 고향을 생각게 한다. 
 

 

가라쓰역사 기타구치를 나서면 아르피노 회관이란 곳이 있고,

그 이층에 가라쓰야끼 종합전시장이 있어 가라츠의 유명한 도방들의 제품을 모두 모아 전시, 판매를 하고 있다.

그래도 값은 역시 만만치 않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아내가 내일 학교 일직을 하기 위해서는 오늘 돌아가야 한다.

하루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심수관, 아리타, 하기야키를 모두 돌아볼 수 있을텐데, 아쉽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