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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사와 적멸보궁

진신사리는 어디서 왔나요?

by 깊은 강 흐르듯이 2021. 4. 28.

용연사 금강계단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어디서 왔을까요? 같은 용연사 경내의 여러 안내문에 제각각으로 표시하고 있어서 더러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적멸보궁 들어가는 일각문 앞의 첫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해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가던 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적멸보궁 바로 앞의 안내문에는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진신사리를 난이 끝난 후 통도사로 다시 옮길 때 일부를 용연사에 모셨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극락전 앞의 안내문은 또 달리 "치악산 각림사에서 옮겨온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용연사 안내용 리플렛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용연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되었다"라고 쓴 부분이 있는가 하면, "임진왜란 때 비슬산 용연사가 안전함을 판단하여 용연사에 봉안하였다"라고 양립하기 어려운 기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에는 동일 사안에 대하여 여러가지의 상이한 기록들이 존재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문화유산 현장의 설명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답은 어차피 없으니 개인적인 의견을 개진하자면, '묘향산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왕이 몽진까지 간 의주로의 길목에 있는 묘향산이 그나마 안전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리플렛을 좀 꼼꼼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진신사리 이야기 다음으로 '탑신(塔)'은 '탑신(塔)'으로 써야 맞고요, '봉리'는 '봉리'로 써야할 것 같습니다. 명부전의 '공덕기와 관음계 현판'은 최근에 철거한 것인지 현재 걸려 있지 않습니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자운문(雲門)'과 '비슬산용연사자운문(琵瑟山龍淵寺雲門)"은 의미는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글자는 현판에 쓰인 대로 '자운문(雲門)', '비슬산용연사자운문(琵瑟山龍淵寺雲門)'이라고 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천왕문의 사천왕탱은 그림을 전면 다시 그리지 않는 한, '동방 지국천이 검(劍)'을 '동방 지국천이 탑(塔)'으로, '서방 광목천이 탑(塔)'을 '서방광목천이 검(劍)'으로 수정하여 그림과 일치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사천왕 조성양식(원대양식, 명대양식)과는 다르긴 해도, 자연방위와도 어느정도 일치하는 차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도군의 '악대사'는 '악대사'로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심검당(종무소)'는 '보장각(종무소)'로 옮겼는데, 임시이전인지 영구이전인지는 모르겠으니 확인이 되어야 겠고요, '감로당'은 '사명당'으로 현판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에서의 13 불이문은 위치가 사명당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용연사 리플렛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다시 제작해야 할 테니, 이런 자료를 모아 가지고 있다가 그 때 가서 다시 한 번 재검토를 해서 인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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