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2999년(서기 666년) 모월 모일
고구려의 왕족 약광은 일단의 사절단을 거느리고 흥남 어디쯤에서 배에 올랐다.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남생, 남산, 남건) 간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막내인 남건이 권력을 잡고, 맏이 남생은 당으로 망명하여 조국 고구려 침공에 앞장서는 풍전등화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맹국이었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마당에 나라 안에서 내분마저 생기게 되니 고구려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생전의 연개소문에 의해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된 보장왕을 보다 못한 약광 등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요량으로 일본행을 자청하고 나섰을 것이다. 동해에 배를 띄운 약광 일행은 연해주 해안을 거쳐 내려오는 리만해류에 배를 실었다. 때마침 편서풍이 불어와 항해를 도왔다.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오키섬을 안표 삼아 긴 항해 끝에 일본의 어느 해안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애초부터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당도해 보니 일본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오랫동안 백제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일본은 멸망직전의 백제를 구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백강(지금의 금강)전투에서 일본군이 전멸하면서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고구려를 도와줄 여력이 없기도 하였고, 백강전투의 악몽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원병 협상은 지지부진하였고, 668년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약광 일행은 일본에 눌러 살게 되었다.
(1340년 후)
단기 4339년(서기 2006년) 8월 17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JAL기가 1시간 40여 분의 비행 끝에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다. 하네다공항(정식명칭:도쿄국제공항)은 나리타(成田)공항(정식명칭:신도쿄국제공항)이 개장하고 나서는 국내선 위주로 사용되는 공항이다. 마찬가지로 김포공항도 인천국제공항이 생긴 후 국내선공항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양 공항 모두 시내에 가까운 점 때문에 김포-하네다 노선 등 제한적으로만 국제선을 운용하고 있다.

공항내의 터미널간 연락버스를 타고 제1터미널빌딩에서 내려 도쿄모노레일을 탔다. 하네다공항에서 도쿄시내로 들어가는 데는 버스, 전차, 모노레일 등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이번 여행에선 되도록 여러 가지 교통시스템을 이용해 보기로 작정한 바 있어 모노레일을 타기로 한 것이다. 도쿄시내의 철도시스템은 대체로 분류하여 세 가지인데, 아직도 가장 많은 노선을 보유하고 있는 ‘전차’와 한 개 노선의 ‘도쿄모노레일’ 그리고 무인조종시스템인 ‘신교통 유리카모메’ 1개 노선이 있다. 모노레일은 전차의 철로와 철제바퀴의 금속성 마찰음이 없어서 승차감이 훨씬 좋다.

텐노즈아이루역에서 링카이(臨海)線 전차로 갈아타고, 고쿠사이텐지죠(國際展示場)역에서 내려 ‘도쿄 베이 아리아케 와싱톤 호텔’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장이라 해야 늘 그렇듯이 한 사람 하나씩의 배낭이 전부다. 그 마저도 영국 공항의 테러기도 사건의 여파로 모든 공항의 검색이 강화되는 바람에 배낭 속에 든 것은 금방 갈아입을 속옷가지 몇 벌과 양말 서너 켤레가 전부다. 여태까지의 여행 중에서 짐 보따리가 제일 적은 것 같다. 가져가서 쓰지도 않을 잡동사니들을 잔뜩 가방에 넣어 갔다가 다시 가지고 오는 일을 없애야 여행이 쉬워진다. 짐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겁다는 걸 모를 리 없건만......
긴 이름의 이 호텔이 위치한 곳은 오다이바(お台場)라는 지역으로 옛날 도쿄항의 개항요구에 맞서기 위해 도쿄만 내에 포대를 설치하였던 곳이 다이바인데, 최근에 다이바 주변의바다를 매립하여 그 부지 위에 국제전시장을 위시하여 배(船)과학관, 오오에도(大江戶)온천 등 각종 시설물을 세워 종합 첨단 신도시로 조성한 곳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바다를 건너 이 곳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레인보우브릿지라고 하는데, 그라운드 레벨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고도를 높여 가는 방식으로, 윗층은 무인조종전차인 유리카모메 레일이고 아래층은 자동차 교량으로 되어 있다. 저녁에 유리카모메를 타고 건너는 레인보우브릿지의 야경은 너무 멋져 얄미울 정도다.

저녁에 시내를 나가 보려고 아리아케(有明)역에서 ‘유리카모메’를 탔다. '유리카모메(百合鷗)'는 사전에 '괭이갈매기'라고 나오는데, 도쿄도의 도조(都鳥)로 지정되어 있으며, 새롭게 조성된 첨단 신도시로 들어가는 신개념 교통수단의 명칭으로 선택된 것이다. 유리카모메의 제1의 특징은 승무원이 없이 자동으로 운전되는 것이다. 전차의 제일 앞자리에 기관사처럼 앉아 있는 사람도 승객이다. 맨 앞자리 3개가 가장 인기 있는 자리다. 노인 부부가 뒤쪽에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서서 기다리다 그 자리에 앉고는 즐거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전차는 헤드라이트가 없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의 우주열차 '스페이스 마운틴'이 연상된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운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길을 밝힐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운전은 안 해도 구경하는 승객을 위해 헤드라이트를 달아 놓았으면 더 좋겠는데 아쉽다. 바퀴는 아마도 고무바퀴인 듯 금속성 마찰음이 없이 승차감도 부드럽다. 경제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을 것 같다. 매연도 거의 없고, 소음도 적으며, 특히 노사분규에 따른 시민의 불편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도쿄타워에 올라 시내를 한 번 조망하고, 긴자(銀座)에서 아이쇼핑만 한 뒤 신바시(新橋)역에서 다시 유리카모메를 타고 그 긴 이름의 호텔로 돌아왔다.
단기 4339년 8월 18일
하코네(箱根)를 가기 위해 야마노테(山手)線을 타고 신쥬쿠(新宿)역으로 갔다. 야마노테선은 JR(일본국영철도)에서 운영하는 도쿄시내의 환상선으로 서울의 2호선과 같다. 동쪽의 도쿄역에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신바시-하마마츠쵸(浜松町)-시나가와(品川)-오오사키(大崎)-시부야(渋谷)-신쥬쿠-이케부쿠로(池袋)-우에노(上野) 의 부도심의 중심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며, 제일 이용률이 높은 노선이다. 하코네나 아타미 등 도쿄의 서쪽 방면으로 가는 여러 열차가 신쥬쿠에서 출발한다. 아! 참, 일본의 열차는 모두가 전철화 되어 이제 기차는 없다. 서북방향은 이케부쿠로, 동북방향은 우에노를 기점으로 열차들이 출발한다.
신쥬쿠에서 하코네유모토(箱根湯元)까지 70분정도 걸린다는 생각만 하고 가볍게 신쥬쿠까지 왔으나, 특급인 하코네로만스카는 만석이란다. 아뿔싸, 일본의 금요일은 주말로 분류된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코네 프리패스(신쥬쿠-하코네마치 간의 모든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패스 : 3일권 5,500엔)를 끊어 급행열차를 탔으나 하코네유모토까지만도 2시간 걸린다고 한다.

하코네유모토역에 내려서 하코네등산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하코네등산열차는 가파른 하코네산을 지그재그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면서 오르는 열차이다.

고라(强羅)라는 역에 내리면 다시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다. 일본의 케이블카는 레일 위에 바퀴달린 열차를 얹고 케이블로 끌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소운산(早雲山)역에 내려서는 로프웨이를 타고 산을 넘게 되어 있다. 이 일련의 코스에서 제일 높은 고갯마루에 있는 오오와쿠다니(大湧谷)역에 내렸다.

오와쿠다니는 이름 그대로 곳곳에 유황온천수가 끓어오르고, 유황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화산이 폭발할 것 같은 곳이다. 대자연의 경이로운 힘을 느껴보려는 것일까? 오르가즘과 같은 짜릿한 스릴을 즐기려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불안한 땅 위로 몰려오는 것이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이 곳의 별미는 단연 쿠로다마고(黑玉子)라는 삶은 계란인데, 유황온천수에 삶아서 계란 속이 까맣게 된 데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걸 한 개씩 먹을 때마다 3년씩을 더 산다는데......시식용 한 개만 얻어먹고 좀 겸연쩍지만 그냥 돌아섰다. 일행 중 아무도 이걸 먹겠다는 이가 없으니, 나 혼자만 목숨에 안달하는 머리 둔한 짐승같이 보일까봐 그냥 돌아선 것이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도겐다이(桃元臺)까지는 수리 중인 로프웨이 대신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갔다.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아시노코(芦ノ湖)를 건너 하코네마치로 간다..

이 호수는 해발 600미터에 화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호수로서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하코네를 하코네답게 하는 천혜의 절경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코네를 발견하고 개발한 것이 다름 아닌 고구려 사람들이다. 모토하코네(元箱根) 근처에 있는 코마진쟈(高麗神社)에는 하코네곤겐에마키(箱根權現繪卷)라고 하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그림이 있는데, 그림 속에 씌어 있는 이야기에 시라나이구니(國)와 하라나이구니(國)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사다이에중장이란 사람과 두 왕자가 있었는데, 이들 세 사람이 하코네三곤겐이 되어 이 신사에 모셔져 있고, 이 시라나이구니와 하라나이구니가 곧 고구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코네에서 오다와라(小田原)를 거쳐 도쿄로 가는 길목에 오오이소(大磯)라는 곳이 있는데, 경상도와 함경도의 방언으로 남아 있는 ‘오십시오’의 뜻인 ‘오이소’에서 온 지명이라고 한다. 이곳 오오이소는 고구려왕 약광 일행이 상륙하였던 곳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며, 다카쿠진쟈(高來神社)라는 신사도 있다. 이 신사에서 매년 7월 18일 열리는 나쯔마쯔리(夏祭) 때는 오오이소 만에 두 척의 범선을 만들어 띄워 약광 일행이 상륙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고라이(고려, 고구려)진쟈라고 하였던 것을, 메이지유신 이후에 다카쿠진쟈로 고쳐 읽게 되었을 것이다.

하코네의 아시노호수의 맑고 푸른 물은 백두산의 천지를 연상하게 한다. 어떤 연유이든 간에 많은 사연을 안은 사람들이 고국을 등지고 바다를 건너 일본 땅으로 왔을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왕족이나,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 등, 그냥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지도층의 사람들이 패배의 통한과 권토중래의 꿈을 버리지 않은 채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넘었을 것이다. 귀양지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나듯이...오늘날 일본의 지도층 중에는 이들의 후예들이 많고, 호전적인 성격 또한 뿌리 깊다고 보면 틀림없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산 넘고 물을 건너 이 곳까지 와서 보니, 고국 고구려 땅의 신선이 사는 곳 백두산 천지와 꼭 닮은 곳을 발견하고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다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산의 품에 안겨 살기로 하고, 그 이름을 고국말로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의 ‘하코네’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하꼬네에서는 하꼬네세끼쇼(箱根關所)가 유명하다. 1603년에 에도바꾸후(江戶幕府)를 세운 토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의 부인을 에도(江戶:토쿄)에 불러들여 볼모로 삼고, 각 지방에 머무르는 다이묘들은 상낀코오다이(參勤交代)라고 하여 정해진 기간만 에도에 와서 쇼군(將軍)을 배알하고, 부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에도로 통하는 주요 통로의 각 요소에는 세끼쇼(關所:검문소)를 설치하고, 데온나(나가는 여자 : 볼모의 탈출)와 이리뎁뽀(들어오는 철포 : 다이묘의 반란)를 감시하였다고 한다.

이 곳 하꼬네세끼쇼(箱根關所)는 1618년에 설치되었고, 세끼쇼(關所) 옆에는 상낀코오다이(參勤交替)하러 가는 다이묘 등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인 하후야(覇府屋)을 마련하였다. 칸사이(關西 : 쿄토. 오사카. 나라)지방에서 하꼬네를 거쳐 에도로 들어가는 길을 토오까이도(東海道)라고 하였는데, 토오까이도(東海道) 연변에는 스기(杉)를 많이 줄지어 심어 이를 스기나미끼(杉竝木)라 부르고, 숙소 주변엔 단풍나무(楓)를 많이 심어 카에데나미끼 (楓竝木)라 불렀다. 그 때의 숙소였던 하후야는 지금 하꼬네호텔이 되어 있고 마당에 그 때의 단풍나무가 한 그루 외롭게 남아 있다.

단기 4339년 8월 19일
예의 그 토쿄 환상선 야마노떼선의 이께부꾸로(池袋)역에 내려서 세이부이께부꾸로(西武池袋)선을 타고 사이타마(崎玉)현 히다까(日高)시의 코마(高麗)역으로 갔다. 토꾜 도심에서 1시간 거리이지만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조그만 역이었다.

플랫폼에 서 있는 '高麗'라는 간판이 보이자 이 곳이 남의 나라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역 문을 나서니 앞마당에 커다랗게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었다. '高麗神社'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걷는 연도의 논밭에는 눈에 익은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배추 가지 토란 옥수수...모양도 크기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땡볕아래 몇 십 분을 걸었을까 '高麗神社' 팻말은 자꾸 나오는데 방향만 표시해 놓았을 뿐 남은 거리를 통 가늠할 수 없었다. 땀은 비 오듯 하는데, 너무나 친절하게 잘 되어 있는 일본의 교통표지판이 여기 와선 왜 이런지 의아하다. "얼마나 더 가야 되노?" 우려했던 일이 예상보다 좀 일찍 찾아왔다. 아내의 목소리에 이 정도 습기가 배어 있으면 불만의 정도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지금부터는 함부로 말을 붙이지 말고 그냥 잠자코 가는 것이 상책이다.
'高麗山 聖天院 勝樂寺'이란 팻말이 보이고 그리 높지 않은 산기슭에 예사롭지 않은 팔작지붕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聖天院은 高麗王 若光의 보리사이다.

(1290년 전)
단기 3049년(서기 716년)
고구려 멸망에 의해 일본에 도래한 고구려인 가운데, 카이(현재의 야마나시) 스루가(현재의 시즈오까) 사가미(현재의 카나가와) 카즈사(현재의 치바) 시모후사(현재의 이바라기) 히타찌(현재의 이바라기) 시모즈께(현재의 토찌기) 7개국의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으로 이주시키고, 코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 현재의 히다까시는 코마군의 중심을 이루었던 지역으로 생각되며, 1889년까지 코마군이었다. 고구려왕 약광은 광야를 개척하고 산업을 일으켜 민생을 안정시켜 크게 치적을 이룩했다. 약광이 죽은 후
단기 3084년(서기 751년)에 지넨소(侍念僧) 쇼라쿠(勝樂)가 약광의 성불을 기원하기 위하여 쇼오라쿠지(勝樂寺)를 건립하였다. 약광의 3남인 소오운(聖雲)과 손자 코오닝(弘仁)이 쇼라쿠의 유지를 계승하여, 약광의 수호불 쇼오텐존(聖天尊)을 본존으로 하였다. 이후 창립이래의 법상종을 진언종으로 변경하고,
단기 3913년(서기 1580년)에는 본존을 부동명왕으로 하였다. 지금의 대까지 무려 1250년간을 끊임없이 계승하여 왔다.
단기 4333년(2000년(平成12년))에는 산 중턱에 새로운 본당을 건립함과 동시에, 재일동포 무연고자의 위령탑도 건립하였다.」
(다시 현재)
단기 4339년 8월 19일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고구려약광왕릉’이라는 비석이 보이고 그 뒤에 ‘고려왕묘’라는 현판이 붙은 묘각이 있다.

묘각 안에는 좀 이상한 모습을 한 4층의 묘탑이 있다. 이 탑은 기단 위에 노반(또는 탑신석이 납작하게 축소되어 노반처럼 된 것)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이 얹히는, 일본에서 흔한 양식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옥개석의 가장자리가 다 깨어져 나가 원통처럼 되어 버린 모습이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그마저도 본래는 5~7층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4층만 남아 있다.

다시 정문에서 곧바로 올라간 곳에 본당이 있고, 본당에는 부동명왕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다. 본당의 좌측 계단 위 넓은 공간에 약광왕의 입상이 세워져 있다.

입상의 앞을 지나 왼쪽의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꽤 널찍한 공간이 있고, 웅장한 다층석탑이 서 있는데, 바로 재일무연고조선인위령탑이다.

임진 정유 양란 때 끌려온 사람들을 비롯하여, 2차 대전 중 동남아 등지에서 이름 없이 숨져 간 동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2000년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재일 백의민족의 성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매년 9월 5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참배객을 맞고 있다.

탑 주위에는 왕인박사, 정몽주, 신사임당 등 여러 위인들의 좌상도 건립하여 민족의 혼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약광왕 입상 앞 종각의 종을 타종하고, 1300년 전의 조상 약광왕과 재일 무연고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문을 나오면서 타종료 200엔을 내었다.
성천원을 나와 가던 길을 얼마 더 가지 않아 코마진쟈(高麗神社) 토리이(鳥居)가 보이고,

그 옆에 장승이 서 있었다.

장승 옆에 매표소 같이 생긴 작은집(小屋)의 처마에는 출세옥(出世屋)이라 적혀 있는데, 무얼 뜻하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이 신사의 내력과 무슨 연관이 있음은 틀림없을 터였다.

토리이를 지나 본전에 이르기 전 안내판에 따르면,

코마진쟈는 고구려국의 왕족 고려왕약광을 모신 신사이다. 고구려인은 중국대륙의 쑹화강 유역에 살던 기마민족(騎馬民族)으로서 조선반도에 진출해서 중국동북부에서 조선반도 북부를 영유하고, 약 700년간 군림하였다. 그 후 당(唐)과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668년에 멸망했다. 그 때 난을 피해 고구려국의 귀족과 승려 등이 다수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는데, 716년에 그 가운데 1799명이 무사시국(武藏國)으로 이주하게 되고, 새로 코마군(高麗郡)이 설치되었다. 고려왕약광은 코마군의 군수로 임명되고, 무사시노(武藏野)의 개발에 힘을 다하고,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었다. 군민들은 그 유덕을 기려, 영령을 모시고 코마묘징(高麗明神)이라 부르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약광의 직계에 의해서 신사가 수호되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이 방문하고 있다.
출세옥에 대한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출세명신(出世明神)의 유래(由來)’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 즉

당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원정(元正)천황 대에 코마군을 통치했던 고려왕약광을 모시는 신사로서 창건으로부터 1300년을 헤아리는 관동(關東)유수의 고사(古社)이다. 옛날부터 영험이 현저하다고 알려졌고, 코마군의 총진수로서 군민의 숭경을 받아온 당 신사는, 근대에 들어와 미즈노 렌타로씨(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동대지진 당시 내무대신, 당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정부에서 조작, 유포했다는 의심을 받는 장본인 - 필자 주), 와까쯔끼 레이지로씨(25, 28대 총리), 하마구찌 오사찌씨(27대 총리), 사이또오 마꼬또씨(조선총독, 총리), 하또야마 이찌로씨(제52-54대 총리) 등의 저명한 정치가가 참배하고, 그 후 잇따라 총리대신에 취임한 것 때문에, 출세개운의 신으로서 숭앙되게 되었다. 특히 법조계에서 이시따 카즈또가 최고재판소 장관, 요시나가 유우스께, 키타지마 케이스께 양씨가 검사총장에 취임했다.
그래서 고려명신이 출세명신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매표소의 간판도 출세옥이 되고...

마침 본전에서는 출세하고 싶은 사람인지, 한 젊은이의 참배를 신관(宮司)이 집전하고 있었다.

이 젊은 신관은 약광왕의 60세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일 것이다. 약광의 직계는 국호인 코마(高麗)를 성(姓)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신사의 신관을 계승하고 있다.
본전의 오른쪽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에도시대의 고려가 주택 1동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지붕이 매우 높고 기울기가 급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엉을 엮는 방법이나 지붕을 덮은 방법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초가지붕과는 사뭇 다르다. 이 집의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따로 상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고구려시대의 건축양식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닭을 토템신앙으로 가진 종족이 닭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으나, 일본의 츠루가(敦賀)지방의 시라끼(白木)라는 마을에 그 풍습이 남아 있는 것과 유사한 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츠루가'는 ‘츠누가 아라시또’라는 가야의 왕자가 도래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고, '시라끼'는 신라인들이 건너와(新羅からきた) 건설한 마을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그 출세옥 옆 주차장에서 신관이 아까의 그 젊은이의 새 차의 무사고를 축원해 주는 장면이 보였다. 출세를 빌어주는 큰일에서부터 새 차의 고사까지 온갖 것을 다 빌어주는 모양...이것이 한국의 풍습인지, 일본의 풍습인지... 잠시 혼란스럽다.
신사 주차장 건너편 우동집에서 야채우동 하나와 출세우동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나서야 아내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돌아왔다. 아주 긴 몇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우동집 할멈에게 자세히 물어서 코마가와(高麗川)를 건너서 코마가와역으로 가기로 하였다. 땀내는 연습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나서 토꾜로 돌아와 우에노 공원의 야경을 잠시 즐겼다. 공원에 인접한 토꾜국립박물관은 폐관시간이 되어 아쉬움으로 다음을 기약하였다.

분수대 벤치에서 정말 오랜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한 한 시간 쯤... 이 한 시간이 몇 년 만에 가져보는 휴식이다. 어둠이 내리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시 인파를 헤집으며 그 긴 이름의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따로 다니기로 하였던 영주샘 모녀가 디즈니랜드를 다녀 와 있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돌아간다. 일상 속으로...
고구려의 왕족 약광은 일단의 사절단을 거느리고 흥남 어디쯤에서 배에 올랐다.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구려는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남생, 남산, 남건) 간에 권력다툼이 일어나 막내인 남건이 권력을 잡고, 맏이 남생은 당으로 망명하여 조국 고구려 침공에 앞장서는 풍전등화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맹국이었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마당에 나라 안에서 내분마저 생기게 되니 고구려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생전의 연개소문에 의해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된 보장왕을 보다 못한 약광 등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요량으로 일본행을 자청하고 나섰을 것이다. 동해에 배를 띄운 약광 일행은 연해주 해안을 거쳐 내려오는 리만해류에 배를 실었다. 때마침 편서풍이 불어와 항해를 도왔다.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오키섬을 안표 삼아 긴 항해 끝에 일본의 어느 해안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애초부터 쉬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당도해 보니 일본의 상황은 더욱 나빴다.
오랫동안 백제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일본은 멸망직전의 백제를 구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백강(지금의 금강)전투에서 일본군이 전멸하면서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일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고구려를 도와줄 여력이 없기도 하였고, 백강전투의 악몽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원병 협상은 지지부진하였고, 668년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약광 일행은 일본에 눌러 살게 되었다.
(1340년 후)
단기 4339년(서기 2006년) 8월 17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JAL기가 1시간 40여 분의 비행 끝에 하네다(羽田)공항에 도착했다. 하네다공항(정식명칭:도쿄국제공항)은 나리타(成田)공항(정식명칭:신도쿄국제공항)이 개장하고 나서는 국내선 위주로 사용되는 공항이다. 마찬가지로 김포공항도 인천국제공항이 생긴 후 국내선공항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양 공항 모두 시내에 가까운 점 때문에 김포-하네다 노선 등 제한적으로만 국제선을 운용하고 있다.
공항내의 터미널간 연락버스를 타고 제1터미널빌딩에서 내려 도쿄모노레일을 탔다. 하네다공항에서 도쿄시내로 들어가는 데는 버스, 전차, 모노레일 등 여러 가지 수단이 있지만 이번 여행에선 되도록 여러 가지 교통시스템을 이용해 보기로 작정한 바 있어 모노레일을 타기로 한 것이다. 도쿄시내의 철도시스템은 대체로 분류하여 세 가지인데, 아직도 가장 많은 노선을 보유하고 있는 ‘전차’와 한 개 노선의 ‘도쿄모노레일’ 그리고 무인조종시스템인 ‘신교통 유리카모메’ 1개 노선이 있다. 모노레일은 전차의 철로와 철제바퀴의 금속성 마찰음이 없어서 승차감이 훨씬 좋다.
텐노즈아이루역에서 링카이(臨海)線 전차로 갈아타고, 고쿠사이텐지죠(國際展示場)역에서 내려 ‘도쿄 베이 아리아케 와싱톤 호텔’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장이라 해야 늘 그렇듯이 한 사람 하나씩의 배낭이 전부다. 그 마저도 영국 공항의 테러기도 사건의 여파로 모든 공항의 검색이 강화되는 바람에 배낭 속에 든 것은 금방 갈아입을 속옷가지 몇 벌과 양말 서너 켤레가 전부다. 여태까지의 여행 중에서 짐 보따리가 제일 적은 것 같다. 가져가서 쓰지도 않을 잡동사니들을 잔뜩 가방에 넣어 갔다가 다시 가지고 오는 일을 없애야 여행이 쉬워진다. 짐이 가벼울수록 여행은 즐겁다는 걸 모를 리 없건만......
긴 이름의 이 호텔이 위치한 곳은 오다이바(お台場)라는 지역으로 옛날 도쿄항의 개항요구에 맞서기 위해 도쿄만 내에 포대를 설치하였던 곳이 다이바인데, 최근에 다이바 주변의바다를 매립하여 그 부지 위에 국제전시장을 위시하여 배(船)과학관, 오오에도(大江戶)온천 등 각종 시설물을 세워 종합 첨단 신도시로 조성한 곳이다. 시내 중심가에서 바다를 건너 이 곳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레인보우브릿지라고 하는데, 그라운드 레벨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고도를 높여 가는 방식으로, 윗층은 무인조종전차인 유리카모메 레일이고 아래층은 자동차 교량으로 되어 있다. 저녁에 유리카모메를 타고 건너는 레인보우브릿지의 야경은 너무 멋져 얄미울 정도다.
저녁에 시내를 나가 보려고 아리아케(有明)역에서 ‘유리카모메’를 탔다. '유리카모메(百合鷗)'는 사전에 '괭이갈매기'라고 나오는데, 도쿄도의 도조(都鳥)로 지정되어 있으며, 새롭게 조성된 첨단 신도시로 들어가는 신개념 교통수단의 명칭으로 선택된 것이다. 유리카모메의 제1의 특징은 승무원이 없이 자동으로 운전되는 것이다. 전차의 제일 앞자리에 기관사처럼 앉아 있는 사람도 승객이다. 맨 앞자리 3개가 가장 인기 있는 자리다. 노인 부부가 뒤쪽에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서서 기다리다 그 자리에 앉고는 즐거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전차는 헤드라이트가 없기 때문이다. 디즈니랜드의 우주열차 '스페이스 마운틴'이 연상된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운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길을 밝힐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운전은 안 해도 구경하는 승객을 위해 헤드라이트를 달아 놓았으면 더 좋겠는데 아쉽다. 바퀴는 아마도 고무바퀴인 듯 금속성 마찰음이 없이 승차감도 부드럽다. 경제성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을 것 같다. 매연도 거의 없고, 소음도 적으며, 특히 노사분규에 따른 시민의 불편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도쿄타워에 올라 시내를 한 번 조망하고, 긴자(銀座)에서 아이쇼핑만 한 뒤 신바시(新橋)역에서 다시 유리카모메를 타고 그 긴 이름의 호텔로 돌아왔다.
단기 4339년 8월 18일
하코네(箱根)를 가기 위해 야마노테(山手)線을 타고 신쥬쿠(新宿)역으로 갔다. 야마노테선은 JR(일본국영철도)에서 운영하는 도쿄시내의 환상선으로 서울의 2호선과 같다. 동쪽의 도쿄역에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신바시-하마마츠쵸(浜松町)-시나가와(品川)-오오사키(大崎)-시부야(渋谷)-신쥬쿠-이케부쿠로(池袋)-우에노(上野) 의 부도심의 중심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며, 제일 이용률이 높은 노선이다. 하코네나 아타미 등 도쿄의 서쪽 방면으로 가는 여러 열차가 신쥬쿠에서 출발한다. 아! 참, 일본의 열차는 모두가 전철화 되어 이제 기차는 없다. 서북방향은 이케부쿠로, 동북방향은 우에노를 기점으로 열차들이 출발한다.
신쥬쿠에서 하코네유모토(箱根湯元)까지 70분정도 걸린다는 생각만 하고 가볍게 신쥬쿠까지 왔으나, 특급인 하코네로만스카는 만석이란다. 아뿔싸, 일본의 금요일은 주말로 분류된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코네 프리패스(신쥬쿠-하코네마치 간의 모든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패스 : 3일권 5,500엔)를 끊어 급행열차를 탔으나 하코네유모토까지만도 2시간 걸린다고 한다.
하코네유모토역에 내려서 하코네등산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하코네등산열차는 가파른 하코네산을 지그재그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면서 오르는 열차이다.
고라(强羅)라는 역에 내리면 다시 케이블카가 기다리고 있다. 일본의 케이블카는 레일 위에 바퀴달린 열차를 얹고 케이블로 끌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소운산(早雲山)역에 내려서는 로프웨이를 타고 산을 넘게 되어 있다. 이 일련의 코스에서 제일 높은 고갯마루에 있는 오오와쿠다니(大湧谷)역에 내렸다.
오와쿠다니는 이름 그대로 곳곳에 유황온천수가 끓어오르고, 유황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화산이 폭발할 것 같은 곳이다. 대자연의 경이로운 힘을 느껴보려는 것일까? 오르가즘과 같은 짜릿한 스릴을 즐기려는 것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불안한 땅 위로 몰려오는 것이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이 곳의 별미는 단연 쿠로다마고(黑玉子)라는 삶은 계란인데, 유황온천수에 삶아서 계란 속이 까맣게 된 데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걸 한 개씩 먹을 때마다 3년씩을 더 산다는데......시식용 한 개만 얻어먹고 좀 겸연쩍지만 그냥 돌아섰다. 일행 중 아무도 이걸 먹겠다는 이가 없으니, 나 혼자만 목숨에 안달하는 머리 둔한 짐승같이 보일까봐 그냥 돌아선 것이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도겐다이(桃元臺)까지는 수리 중인 로프웨이 대신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갔다.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아시노코(芦ノ湖)를 건너 하코네마치로 간다..
이 호수는 해발 600미터에 화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호수로서 맑은 물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하코네를 하코네답게 하는 천혜의 절경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코네를 발견하고 개발한 것이 다름 아닌 고구려 사람들이다. 모토하코네(元箱根) 근처에 있는 코마진쟈(高麗神社)에는 하코네곤겐에마키(箱根權現繪卷)라고 하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그림이 있는데, 그림 속에 씌어 있는 이야기에 시라나이구니(國)와 하라나이구니(國)로부터 바다를 건너온 사다이에중장이란 사람과 두 왕자가 있었는데, 이들 세 사람이 하코네三곤겐이 되어 이 신사에 모셔져 있고, 이 시라나이구니와 하라나이구니가 곧 고구려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코네에서 오다와라(小田原)를 거쳐 도쿄로 가는 길목에 오오이소(大磯)라는 곳이 있는데, 경상도와 함경도의 방언으로 남아 있는 ‘오십시오’의 뜻인 ‘오이소’에서 온 지명이라고 한다. 이곳 오오이소는 고구려왕 약광 일행이 상륙하였던 곳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며, 다카쿠진쟈(高來神社)라는 신사도 있다. 이 신사에서 매년 7월 18일 열리는 나쯔마쯔리(夏祭) 때는 오오이소 만에 두 척의 범선을 만들어 띄워 약광 일행이 상륙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옛날에는 고라이(고려, 고구려)진쟈라고 하였던 것을, 메이지유신 이후에 다카쿠진쟈로 고쳐 읽게 되었을 것이다.
하코네의 아시노호수의 맑고 푸른 물은 백두산의 천지를 연상하게 한다. 어떤 연유이든 간에 많은 사연을 안은 사람들이 고국을 등지고 바다를 건너 일본 땅으로 왔을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왕족이나,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 등, 그냥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지도층의 사람들이 패배의 통한과 권토중래의 꿈을 버리지 않은 채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넘었을 것이다. 귀양지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 많이 나듯이...오늘날 일본의 지도층 중에는 이들의 후예들이 많고, 호전적인 성격 또한 뿌리 깊다고 보면 틀림없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산 넘고 물을 건너 이 곳까지 와서 보니, 고국 고구려 땅의 신선이 사는 곳 백두산 천지와 꼭 닮은 곳을 발견하고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다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산의 품에 안겨 살기로 하고, 그 이름을 고국말로 ‘신선이 사는 산’이라는 뜻의 ‘하코네’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하꼬네에서는 하꼬네세끼쇼(箱根關所)가 유명하다. 1603년에 에도바꾸후(江戶幕府)를 세운 토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의 부인을 에도(江戶:토쿄)에 불러들여 볼모로 삼고, 각 지방에 머무르는 다이묘들은 상낀코오다이(參勤交代)라고 하여 정해진 기간만 에도에 와서 쇼군(將軍)을 배알하고, 부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에도로 통하는 주요 통로의 각 요소에는 세끼쇼(關所:검문소)를 설치하고, 데온나(나가는 여자 : 볼모의 탈출)와 이리뎁뽀(들어오는 철포 : 다이묘의 반란)를 감시하였다고 한다.
이 곳 하꼬네세끼쇼(箱根關所)는 1618년에 설치되었고, 세끼쇼(關所) 옆에는 상낀코오다이(參勤交替)하러 가는 다이묘 등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인 하후야(覇府屋)을 마련하였다. 칸사이(關西 : 쿄토. 오사카. 나라)지방에서 하꼬네를 거쳐 에도로 들어가는 길을 토오까이도(東海道)라고 하였는데, 토오까이도(東海道) 연변에는 스기(杉)를 많이 줄지어 심어 이를 스기나미끼(杉竝木)라 부르고, 숙소 주변엔 단풍나무(楓)를 많이 심어 카에데나미끼 (楓竝木)라 불렀다. 그 때의 숙소였던 하후야는 지금 하꼬네호텔이 되어 있고 마당에 그 때의 단풍나무가 한 그루 외롭게 남아 있다.
단기 4339년 8월 19일
예의 그 토쿄 환상선 야마노떼선의 이께부꾸로(池袋)역에 내려서 세이부이께부꾸로(西武池袋)선을 타고 사이타마(崎玉)현 히다까(日高)시의 코마(高麗)역으로 갔다. 토꾜 도심에서 1시간 거리이지만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조그만 역이었다.
플랫폼에 서 있는 '高麗'라는 간판이 보이자 이 곳이 남의 나라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역 문을 나서니 앞마당에 커다랗게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었다. '高麗神社'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걷는 연도의 논밭에는 눈에 익은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배추 가지 토란 옥수수...모양도 크기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땡볕아래 몇 십 분을 걸었을까 '高麗神社' 팻말은 자꾸 나오는데 방향만 표시해 놓았을 뿐 남은 거리를 통 가늠할 수 없었다. 땀은 비 오듯 하는데, 너무나 친절하게 잘 되어 있는 일본의 교통표지판이 여기 와선 왜 이런지 의아하다. "얼마나 더 가야 되노?" 우려했던 일이 예상보다 좀 일찍 찾아왔다. 아내의 목소리에 이 정도 습기가 배어 있으면 불만의 정도가 상당하다는 뜻이다. 지금부터는 함부로 말을 붙이지 말고 그냥 잠자코 가는 것이 상책이다.
'高麗山 聖天院 勝樂寺'이란 팻말이 보이고 그리 높지 않은 산기슭에 예사롭지 않은 팔작지붕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聖天院은 高麗王 若光의 보리사이다.
(1290년 전)
단기 3049년(서기 716년)
고구려 멸망에 의해 일본에 도래한 고구려인 가운데, 카이(현재의 야마나시) 스루가(현재의 시즈오까) 사가미(현재의 카나가와) 카즈사(현재의 치바) 시모후사(현재의 이바라기) 히타찌(현재의 이바라기) 시모즈께(현재의 토찌기) 7개국의 고구려인 1799명을 무사시국으로 이주시키고, 코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 현재의 히다까시는 코마군의 중심을 이루었던 지역으로 생각되며, 1889년까지 코마군이었다. 고구려왕 약광은 광야를 개척하고 산업을 일으켜 민생을 안정시켜 크게 치적을 이룩했다. 약광이 죽은 후
단기 3084년(서기 751년)에 지넨소(侍念僧) 쇼라쿠(勝樂)가 약광의 성불을 기원하기 위하여 쇼오라쿠지(勝樂寺)를 건립하였다. 약광의 3남인 소오운(聖雲)과 손자 코오닝(弘仁)이 쇼라쿠의 유지를 계승하여, 약광의 수호불 쇼오텐존(聖天尊)을 본존으로 하였다. 이후 창립이래의 법상종을 진언종으로 변경하고,
단기 3913년(서기 1580년)에는 본존을 부동명왕으로 하였다. 지금의 대까지 무려 1250년간을 끊임없이 계승하여 왔다.
단기 4333년(2000년(平成12년))에는 산 중턱에 새로운 본당을 건립함과 동시에, 재일동포 무연고자의 위령탑도 건립하였다.」
(다시 현재)
단기 4339년 8월 19일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고구려약광왕릉’이라는 비석이 보이고 그 뒤에 ‘고려왕묘’라는 현판이 붙은 묘각이 있다.
묘각 안에는 좀 이상한 모습을 한 4층의 묘탑이 있다. 이 탑은 기단 위에 노반(또는 탑신석이 납작하게 축소되어 노반처럼 된 것)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이 얹히는, 일본에서 흔한 양식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옥개석의 가장자리가 다 깨어져 나가 원통처럼 되어 버린 모습이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그마저도 본래는 5~7층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4층만 남아 있다.
다시 정문에서 곧바로 올라간 곳에 본당이 있고, 본당에는 부동명왕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다. 본당의 좌측 계단 위 넓은 공간에 약광왕의 입상이 세워져 있다.
입상의 앞을 지나 왼쪽의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꽤 널찍한 공간이 있고, 웅장한 다층석탑이 서 있는데, 바로 재일무연고조선인위령탑이다.
임진 정유 양란 때 끌려온 사람들을 비롯하여, 2차 대전 중 동남아 등지에서 이름 없이 숨져 간 동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2000년에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재일 백의민족의 성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매년 9월 5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참배객을 맞고 있다.
탑 주위에는 왕인박사, 정몽주, 신사임당 등 여러 위인들의 좌상도 건립하여 민족의 혼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약광왕 입상 앞 종각의 종을 타종하고, 1300년 전의 조상 약광왕과 재일 무연고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정문을 나오면서 타종료 200엔을 내었다.
성천원을 나와 가던 길을 얼마 더 가지 않아 코마진쟈(高麗神社) 토리이(鳥居)가 보이고,
그 옆에 장승이 서 있었다.
장승 옆에 매표소 같이 생긴 작은집(小屋)의 처마에는 출세옥(出世屋)이라 적혀 있는데, 무얼 뜻하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이 신사의 내력과 무슨 연관이 있음은 틀림없을 터였다.
토리이를 지나 본전에 이르기 전 안내판에 따르면,
코마진쟈는 고구려국의 왕족 고려왕약광을 모신 신사이다. 고구려인은 중국대륙의 쑹화강 유역에 살던 기마민족(騎馬民族)으로서 조선반도에 진출해서 중국동북부에서 조선반도 북부를 영유하고, 약 700년간 군림하였다. 그 후 당(唐)과 신라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668년에 멸망했다. 그 때 난을 피해 고구려국의 귀족과 승려 등이 다수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는데, 716년에 그 가운데 1799명이 무사시국(武藏國)으로 이주하게 되고, 새로 코마군(高麗郡)이 설치되었다. 고려왕약광은 코마군의 군수로 임명되고, 무사시노(武藏野)의 개발에 힘을 다하고, 다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곳에서 죽었다. 군민들은 그 유덕을 기려, 영령을 모시고 코마묘징(高麗明神)이라 부르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약광의 직계에 의해서 신사가 수호되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이 방문하고 있다.
출세옥에 대한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출세명신(出世明神)의 유래(由來)’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 즉
당 신사는 멀리 나라시대 원정(元正)천황 대에 코마군을 통치했던 고려왕약광을 모시는 신사로서 창건으로부터 1300년을 헤아리는 관동(關東)유수의 고사(古社)이다. 옛날부터 영험이 현저하다고 알려졌고, 코마군의 총진수로서 군민의 숭경을 받아온 당 신사는, 근대에 들어와 미즈노 렌타로씨(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동대지진 당시 내무대신, 당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정부에서 조작, 유포했다는 의심을 받는 장본인 - 필자 주), 와까쯔끼 레이지로씨(25, 28대 총리), 하마구찌 오사찌씨(27대 총리), 사이또오 마꼬또씨(조선총독, 총리), 하또야마 이찌로씨(제52-54대 총리) 등의 저명한 정치가가 참배하고, 그 후 잇따라 총리대신에 취임한 것 때문에, 출세개운의 신으로서 숭앙되게 되었다. 특히 법조계에서 이시따 카즈또가 최고재판소 장관, 요시나가 유우스께, 키타지마 케이스께 양씨가 검사총장에 취임했다.
그래서 고려명신이 출세명신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매표소의 간판도 출세옥이 되고...
마침 본전에서는 출세하고 싶은 사람인지, 한 젊은이의 참배를 신관(宮司)이 집전하고 있었다.
이 젊은 신관은 약광왕의 60세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일 것이다. 약광의 직계는 국호인 코마(高麗)를 성(姓)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신사의 신관을 계승하고 있다.
본전의 오른쪽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에도시대의 고려가 주택 1동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지붕이 매우 높고 기울기가 급하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이엉을 엮는 방법이나 지붕을 덮은 방법이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초가지붕과는 사뭇 다르다. 이 집의 건축양식에 대해서는 따로 상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고구려시대의 건축양식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닭을 토템신앙으로 가진 종족이 닭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사라졌으나, 일본의 츠루가(敦賀)지방의 시라끼(白木)라는 마을에 그 풍습이 남아 있는 것과 유사한 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츠루가'는 ‘츠누가 아라시또’라는 가야의 왕자가 도래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고, '시라끼'는 신라인들이 건너와(新羅からきた) 건설한 마을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그 출세옥 옆 주차장에서 신관이 아까의 그 젊은이의 새 차의 무사고를 축원해 주는 장면이 보였다. 출세를 빌어주는 큰일에서부터 새 차의 고사까지 온갖 것을 다 빌어주는 모양...이것이 한국의 풍습인지, 일본의 풍습인지... 잠시 혼란스럽다.
신사 주차장 건너편 우동집에서 야채우동 하나와 출세우동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나서야 아내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가 돌아왔다. 아주 긴 몇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우동집 할멈에게 자세히 물어서 코마가와(高麗川)를 건너서 코마가와역으로 가기로 하였다. 땀내는 연습을 한 번 더 반복하고 나서 토꾜로 돌아와 우에노 공원의 야경을 잠시 즐겼다. 공원에 인접한 토꾜국립박물관은 폐관시간이 되어 아쉬움으로 다음을 기약하였다.
분수대 벤치에서 정말 오랜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한 한 시간 쯤... 이 한 시간이 몇 년 만에 가져보는 휴식이다. 어둠이 내리는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다시 인파를 헤집으며 그 긴 이름의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은 따로 다니기로 하였던 영주샘 모녀가 디즈니랜드를 다녀 와 있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돌아간다. 일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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